[단독] 헌법 제정 전 美군정 때라도 "헌법 원칙 적용"…법원 첫 판단
"하곡수집 반대" 포고령 2호 위반 징역 1년 농민…법원, 재심 개시 결정
"형식적 의미 헌법 없어도 정당성 판단 가능…포고령 죄형법정주의 위반"
- 이장호 기자
(서울=뉴스1) 이장호 기자 = 1948년 7월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아직 공포되기 전인 미군정 때라도 헌법의 보편적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법원 첫 판단이 나왔다.
법원은 미군정 때 발령된 포고령이 헌법상 죄형법정주의를 위반했다며, 포고령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던 농민의 재심을 개시하는 결정을 내렸다.
법원이 헌법 제정 이후 사건에서 포고령이 위헌이라고 판시한 적은 있었지만 헌법 제정 전 사건에서도 헌법의 보편적 원칙을 적용해 포고령을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창원지법 마산지원 형사1부(재판장 한지형 부장판사)는 포고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던 고(故) 강모 씨의 재심 신청에 대해 지난 3일 개시 결정을 내렸다.
강 씨는 1948년 2월 미군정이 식량 통제를 위해 시행했던 양곡 공출 및 수매 제도인 '하곡수집'에 반대해 하곡수집에 반대한 면장 등을 체포·호송하던 경찰관들을 습격하고 소요를 야기한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명의로 발령된 미군정 포고령 2호는 '포고·명령·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등은 점령군군율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유족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조사를 신청했으나 기각당했고, 법원에 바로 재심개시 신청을 했다. 검사는 재판에서 "강 씨에 대한 판결은 헌법이 제정되기 전에 이뤄졌기 때문에 위헌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헌법 제정 전이라도 헌법의 보편적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기 전의 우리나라에 성문헌법 형태의 헌법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런 때에도 법률 이하의 하위 규범이나 관습법 등을 토대로 한 법질서는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형식적 의미의 헌법이 없더라도 가장 높은 단계에서 법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을 찾을 수 있다면 이것에 헌법의 효력이 있다거나 형식적 의미의 헌법에 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944년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는 법률에 의하지 않은 신체수색․체포․감금․심문․처벌을 받지 않을 권리를 명시해 죄형법정주의를 천명했고, 이는 제헌 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됐다"며 "임시헌장의 죄형법정주의는 제헌 헌법의 기초가 됐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이를 기준 삼아 당시 법질서의 헌법적 정당성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만약 포고령 죄형법정주의를 위반하는 것이 명백함에도 이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헌법이 정하고 있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고 기본적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포고령 2호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포괄적·추상적이기 때문에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된다며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ho86@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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