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검증 꺼리는 판사들]㊦ 실체적 진실에 한발 더 다가서기 위해선

"하루 현장검증에 주말근무 불가피…추가비용 사비로"
"판사 수 늘려 부담 줄이고 현장검증비 현실화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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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이장호 기자 = 판사들이 재판에 결정적일 수 있는 현장검증에 소극적인 이유는 평소 과도한 업무로 하루의 대부분을 할애해야 하는 현장검증을 나가기를 꺼려하고, 굳이 현장에 나가지 않더라도 현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달됐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판사들이 현장을 직접 확인하면 더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고, 당사자들은 재판에 더 만족하게 되는 등 현장검증은 사법신뢰를 높이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법조계에서는 현장검증을 보다 활성화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중요성 알지만 현실적 어려움 있어

판사들이 현장검증을 기피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바쁜 재판 일정 속에서 현장검증을 나가면 다른 재판 기록 검토 등이 늦어져 결국 추가적 업무 부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하루 현장검증을 다녀오면 시간을 다 뺏기는데 현재 업무량에 하루 시간을 뺏기면 주말에 나와 일을 해야 한다"며 "예전에는 감정비로 돈으로 보상받았지만, 현재는 내 돈 쓰고 주말에도 또 일을 해야 하기 떄문에 현장검증을 잘 안 받아주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판사도 "공무원인 판사가 당연히 현장검증도 업무이고, 현장검증도 나가야한 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나치게 적게 지급되는 현장검증비도 현장검증이 줄어든 이유 중 하나다. 10여년 전까지는 통일된 기준 없이 법원별로 현장검증비 산정기준이 별도로 마련돼 있었다. 한 번 검증을 나가면 통상 1인당 10여만원 정도가 나왔다. 이 비용은 신청당사자가 부담했다.

그러나 당사자가 재판부 현장검증비를 과다하게 지급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문제제기와 함께 법원별로 산재돼 있던 기준을 통일하기 위해 2008년 '증거조사 출장여비 등 산정 및 지급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이 제정됐다.

지침에 따르면 근무지 내로 현장검증을 가는 경우, 소요시간이 4시간 이상이 걸릴 경우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2만원, 공용 전용차를 이용하면 1만원, 전용차 배정자는 여비가 없다. 4시간 미만이 걸리는 곳으로 현장검증을 갈 경우 대중교통이용는 1만원만 지급하고 공용차를 이용할 경우 여비가 없다. 민사·행정 소송은 당사자가 비용을 부담하고, 형사 사건의 경우 국가에서 부담한다.

실제 지출한 비용이 예납된 비용을 넘는 경우 추가납부 절차 또는 국고대납절차를 거친 뒤 여비 등 정산 신청서에 사유와 내역을 제출한 경우 추가지급한다고 정하고 있지만, 일선 판사들은 "몇만원 비용 받으려고 서류 작업을 따로 하는 판사는 아마 한 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한 부장판사는 "예전에는 검증비로 배석판사와 실무관을 대동하고 가더라도 점심을 먹고도 돈이 남아 그나마 시간에 대한 보상이 됐는데, 지금은 밥을 사먹으면 바로 오버돼 오히려 판사가 사비를 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토로했다.

발달된 과학기술도 현장검증이 줄어든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과거에는 현장을 단편적 사진 정도로만 확인할 수 있어 현장검증의 필요성이 높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구글맵이나 로드뷰를 통해 현장을 확인할 수 있고, 휴대전화나 드론 등을 통한 동영상 촬영 등 현장검증을 대체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늘어나면서 현장검증의 필요성이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사진이나 동영상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는 부분이 현장에 가 보아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 7월6일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판사 김형두)는 남편 유기치사 혐의로 기소된 박모씨의 현장검증을 진행했다. 사진은 김형두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이 현장검증을 시작하기 전 수사기록을 보는 모습. ⓒ 뉴스1

◇판사들 업무 부담 줄이고 현장검증비 현실화해야

현장검증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판사들의 업무 부담을 줄이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법조인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박준영 변호사는 "법원의 재판 업무가 너무 많다 보니 현장검증을 잘 나갈 수 없는 판사들도 답답할 것. 현실적 문제를 이해해줘야 한다"라며 "현장검증을 활성화 하려면 업무 부담을 줄여줄 수 있도록 법관의 숫자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고법판사도 "결국 현장검증조차 갈 수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업무량이 문제"며 "업무 부담을 줄이지 않고서는 판사들이 현장검증을 기피하는 분위기를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검증비의 현실화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돈을 얼마든지 들이더라도 판사들에게 충실한 재판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한 부장판사는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몇천만원에서 몇억원이 걸린 사건에서 판사가 몇십만원 더 받고 현장에 가는 걸 좋아할지, 몇십만원이 부담스러워 현장검증보다 그냥 인터넷 지도에 나오는 사진들을 제출하는 게 좋아할지는 명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ho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