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여진 계속…일선 법관들 '부글부글'
- 윤진희 기자
(서울=뉴스1) 윤진희 기자 = 사법개혁 모색을 위한 판사들의 학술대회를 축소하기 위해 대법원이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 규명에 나선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이인복 전 대법관)의 결과 발표를 놓고 일선 판사들의 문제제기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진상조사위는 지난 18일 법원 내부 전산망 '코트넷'에 A4 57페이지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게시해 지난달 24일부터 이날까지 26일간 진행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위는 법원행정처가 사법개혁을 주제로 하는 학술대회를 축소하려고 법관들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 가운데 일부만을 사실로 인정했다. 하지만 학술대회 축소 등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판사를 인사 조치하는 등 탄압을 했다는 의혹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놓았다. 또 논란이 됐던 ‘법관 블랙리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일선 법관들은 조사위 결과를 수긍하지 않고 법원 내부 전산망 ‘코트넷’등에 조사위의 조사방식 등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나섰다.
◇ 문제의 PC 확인도 않고 “블랙리스트 없다” 결론…“섣부르다” 비난 쇄도
법관들의 주업무는 재판이다. 사건과 관련된 증거들을 종합해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사실’을 확정하는 작업이 재판을 위한 전제 작업이다.
이 때문에 다수 법관들은 이번 조사위원회 보고서가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확인하지 않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는 등 허점과 오류가 많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논리로 중무장한 법관들을 납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다.
조사위원회가 결과보고서를 배포한 18일 일과 시간 이후 법관들은 코트넷에 직접 조사결과 보고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는 글을 게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판사들은 조사위원회가 물적 증거 확보 등 필요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은 채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낸 것을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재경지원 소속의 A 부장판사는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이모 판사(38)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명확함에도 심의관의 진술과 납득하기 어려운 정황을 근거로 의심스러운 컴퓨터 파일이나 이메일에 접근해 보지도 못하고 블랙리스트의 존부에 대한 성급한 결론을 내린 측면이 강하지 않나”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조사위원회가) 물적자료를 강제로 확보할 근거와 방법이 없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아야 됨에도 왜 결론을 내렸다”고 지적했다.
또한 “(블랙리스트 조사와 관련해) 법원행정처와 법원행정처장이 협조한 것은 무엇인가”라며 “행정처나 처장의 비협조로 임의제출에만 의존한 것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전주지법 군산지원의 차성안 판사는 “(조사과정에서) 언급된 기조실 컴퓨터의 비밀번호 걸린 뒷조사 파일의 존재 여부는 하드디스크를 확보해서 살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인데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결론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차 판사는 “행정처가 하드 디스크 제공을 거부했다면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는 게 합리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행정처가 떳떳했다면 그런 자료(뒷조사 파일) 만든 적이 없으니 못주겠다고 하기 보다는 문제된 기획조정실 하드를 제공해 떳떳함을 밝혔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또 이번 진상조사와 관련해 판사회의 대표로 뽑혀 조사위에 일선 판사들의 입장을 전달했던 B 판사 역시 “(부당압력을 받은) 이탄희 판사는 블랙리스트에 관한 얘기를 듣고 큰 부담감을 느끼게 됐고, 행정처 근무에 대한 실망과 법관직에 대한 회의를 느껴 사직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며 “조사위가 컴퓨터 파일이나 이메일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하고서 성급하게 블랙리스트의 존부에 대한 결론을 내렸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조사위, 법원행정처 윗선 보호 위해 무리수 뒀나?
법관들은 또 조사위원회가 이번 사건으로부터 법원 수뇌부를 지나치게 보호하려고 한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발령 받은 한 법관이 학술대회 축소지시는 물론 법관 뒷조사 문서에 대한 언급에 충격을 받아 사의를 표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론화됐다.
조사위의 결과보고가 있기 전에 일부 언론이 해당 법관이 조사위에서 압박을 받은 적이 없다는 진술을 했다는 사실을 기재하고 있다.
하지만 조사보고서에 기재된 양 당사자의 진술을 보면 학술대회 축소 압박을 받은 해당 법관은 관련 내용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진술을 한 반면 반대진술을 한 이 모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압박과 뒷조사 문건과 관련해 상대적으로 두루뭉술한 진술을 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조사위원회는 이탄희 판사에게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이규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진술에 더 무게를 둬 이 판사에 대한 압박과 법관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판사들 역시 이 부분에 주목해 조사위원회가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하고 있다.
법관의 인사에 관한 결재권자는 양승태 대법원장이다. 또 법관의 인사 번복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상식선에서 판단해도 이례적인 인사번복 사안을 결재하는 과정에서 양 대법원장이 관련 보고를 받지 않았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양승태 대법원장과 고영한 법원행정처장 등도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압박과 법관 뒷조사 문건 등을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도 상당하다는 분석이다. 결국 양 대법원장과 고 법원행정처장 등 대법원 수뇌부 역시 이번 사안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조사위는 이탄희 판사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진 이규진 상임위원에게 거의 모든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결론을 냈다. 대법원 수뇌부의 직접 책임은 인정하지 않고 이 상임위원의 부당행위가 있었고 이를 행정처 수뇌부가 참석하는 회의에서 보고했기 때문에 수뇌부에게는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가 발표된 지 사흘째인 20일 현재까지 대법원은 이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대법원은 이날 늦은 오후쯤 진상조사위원회 조사결과에 대한 입장을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법조전문기자·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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