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법 100일] 안전 챙겼더니 사용자?…건설현장 딜레마

10대 건설사 9곳 사용자 인정…원청·하청 교섭 새 국면
안전관리 조치도 판단 근거 활용…본사 중심 대응체계 강화

서울 시내 한 아파트 공사장의 모습(기사 내용과 무관)ⓒ 뉴스1 최지환 기자

(서울=뉴스1) 김종윤 기자 = A 건설사는 최근 하청 노조 관련 현장 대응 체계를 손보고 있다. 협력업체 근로자의 안전·작업환경 관련 요구가 접수될 경우 현장에서 즉시 답변하지 않고 본사 노무·법무 부서와 먼저 공유하도록 지침을 바꿨다. 본사 차원에서 구축한 안전관리 시스템과 현장 가이드라인이 노동위원회의 사용자성 인정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노동조합법 개정(노란봉투법) 시행 100일(오는 17일)을 앞둔 건설업계가 원청 사용자성 인정 확산이라는 새로운 변수와 마주하고 있다. 시행 당시 우려했던 공사 중단이나 대규모 현장 혼란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노동위원회가 산업안전과 작업환경 등 일부 의제에 대해 원청의 사용자성을 잇달아 인정하면서 건설사들은 현장 대응 체계를 재정비하는 모습이다.

원청 건설사들이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해야 할 가능성이 커진 데다 안전관리 조치가 사용자성 판단 근거로 활용되면서 현장 관리와 노무 대응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노동위원회, 건설사 사용자성 인정 잇달아 판정

14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지난 3월 개정 노동조합법 시행 이후 국내 시공능력평가 순위 10대 건설사 가운데 9곳이 노동위원회로부터 하청 노조에 대한 사용자성을 인정받았다.

포스코이앤씨를 시작으로 삼성물산, 현대건설 등 주요 건설사에 대한 인정 판단이 이어지면서 원청이 하청 근로자의 근로조건 중 일부를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고 본 노동위원회 판단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하는 모습이다.

사용자성은 직접 고용 관계가 없더라도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구체적으로 지배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지위를 의미한다. 사용자성이 인정되면 원청은 해당 의제에 대한 하청 노조의 교섭 요구에 응해야 한다.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의 재심 판단도 변수다. 노동위원회 사건은 통상 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가 1차 판단을 맡고, 이에 불복할 경우 중노위가 재심을 진행한다.

중노위는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 첫 재심에서 중흥건설과 중흥토건의 사건에서 하청 근로자에 대한 사용자성을 인정했다. 지노위 판단이 뒤집히면서 향후 사용자성 인정 범위를 둘러싼 논의도 확대되는 모습이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원청은 안전관리 시스템 운영과 가이드라인을 현장에 배포하고 있다"며 "이러한 점을 근거로 안전·작업환경 의제만 사용자성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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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관리 의무와 사용자성 인정 사이 딜레마

건설업계가 주목하는 지점은 단순히 교섭 의무가 아니다.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원청이 수행하는 안전관리 활동이 사용자성 판단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제63조는 도급인이 관계수급인 근로자의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안전보건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원청 입장에서는 법적 의무에 따라 수행하는 안전관리 활동이 사용자성 판단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건설 현장은 다수 협력업체와 직종이 동시에 작업하는 구조다. 원청이 공정 관리와 안전 기준을 총괄하지 않으면 현장 안전을 담보하기 어렵다.

수도권 한 재건축 현장소장은 "안전 문제는 원청이 챙길 수밖에 없는 영역"이라며 "안전관리와 작업환경 개선을 위해 개입하는 행위까지 사용자성 판단 근거가 된다면 현장 입장에서는 고민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형 건설사 관계자는 "예전에는 협력업체 노무 문제로 봤던 사안도 이제는 본사와 상의하는 경우가 늘었다"며 "최근에는 현장 자체 판단보다 본사 보고 체계를 강화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대한건설협회는 "노동위원회가 원청의 안전관리 조치를 사용자성 인정 근거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원청의 안전관리는 법적 책무일 뿐 근로조건 지배·결정권 행사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판례 공백 속 대응 분주…본사 중심 관리 강화

건설사들은 아직 관련 판례가 축적되지 않은 만큼 대응 기준을 정비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일단 내부적으로는 현장 단위 개별 대응보다 본사 차원의 일원화된 대응 체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현장소장이 하청 노조나 협력업체 근로자의 요구를 개별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데다 현장별 대응이 엇갈릴 경우 향후 교섭 과정에서 혼선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요 건설사들은 노무·법무 조직을 중심으로 현장 대응 기준을 정비하고 관련 이슈를 본사에서 관리하는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다만 사용자성이 인정됐다고 해서 곧바로 교섭이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교섭 요구 주체의 대표성 확인과 의제별 판단 등 절차가 남아 있어 실제 협의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향후 안전관리비 증액, 작업환경 개선비, 외주비 조정 등이 논의될 경우 원가와 공정 관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향후 중노위와 법원 판단이 축적되면서 사용자성 인정 범위는 보다 구체화될 전망이다. 그 과정에서 건설 현장 특성과 원청의 안전관리 역할, 교섭 범위를 둘러싼 논의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대한건설협회는 "안전 의무 조치 이행이 사용자성 인정 근거로 활용되지 않도록 법령 개정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며 "건설 현장 특성을 반영한 사용자성 판단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passionkj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