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 매물 절벽, 구조적 불안의 그림자 [박원갑의 집과 삶]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

정부의 10·15 부동산 대책 발표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거래절벽과 매물 잠김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시내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 사무소에 붙어 있는 전세 등 매물 광고. /뉴스1 ⓒ News1 장수영 기자

요즘 부동산중개업소를 둘러보면 '전세 매물 기근'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거래할 수 있는 전세는 드물고, 그마저도 대부분 준전세나 준월세 형태다. 전세 시장이 단순한 가을 성수기를 넘어 구조적 불안의 징후를 드러내며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27일 부동산정보업체 '아실'에 따르면 최근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지난해 말보다 21%가량 감소했다. 3년 전 이맘때에 비하면 거의 반토막 수준이다. 단순한 계절적 요인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수치다. 경기도 역시 지난해 말보다 33%나 줄었다.

전세 매물이 급감한 배경에는 정책을 비롯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우선 5년 전 '주택임대차 2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 시행 이후 기존 세입자들이 계약갱신청구권을 활용해 장기 거주하면서 유통되는 전세 물량이 크게 줄었다. 여기에 지난 6·27 대책으로 '대출을 내서 집을 사면 6개월 내 입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으면서 투자 목적의 매입이 감소했다. 임대를 놓을 수 있는 여지도 줄었다.

이 여파로 수요자 체감 지표인 전세수급지수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KB부동산에 따르면 20일 기준 수도권 아파트 전세수급지수는 157.1을 기록했다. 지난 8월 25일 조사 당시 150선을 넘은 이후 꾸준히 상승세다. 전세수급지수(범위 0~200)는 100을 초과할수록 '공급 부족' 비중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20일부터 시행된 토지거래허가구역 확대 조치도 전세 시장에 불똥이 튈 것으로 보인다. 서울 전역과 경기 남부 벨트 12곳에서 아파트를 사려면 2년 이상 실거주해야 한다. 집을 사도 세를 놓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는 곧 전세 공급 감소로 이어진다.

이번 10·15대책에 따른 대출 규제로 아파트 매매 대신 전세를 선택하는 실수요층은 늘어날 전망이다. 가뜩이나 빌라 전세 사기 여파로 전세 수요가 아파트로 몰리는 상황이다. 최근엔 양도세 장기보유 특별공제를 받기 위해 전세를 놓고 전세로 살던 고가 1주택자들이 자기 집으로 입주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 같은 요인들이 겹쳐 전세 품귀를 심화시킬 수 있다.

물론 10·15 대책 이후 단기적으로 전셋값이 급등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번 대책이 시장을 급속 냉각하는 효과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매매와 전세 시장은 맞물려 움직인다. 매매가 위축되면 전세 거래도 함께 줄어든다. 하지만 주택시장이 다시 회복세로 접어들면 전세 시장의 불안은 다시 커질 수 있다. 이미 매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라 작은 충격에도 시장이 요동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토연구원 연구 결과 전셋값이 1% 오를 때마다 주택 매매 가격은 0.65% 상승한다.

주택시장은 재고(stock)뿐 아니라 흐름(flow)도 중요하다. 아무리 저수지에 물이 많아도 냇가에 흐르는 물이 적으면 고기가 살 수 없다. 경제도 마찬가지다. 전월세 물량이 원활히 순환하지 않으면 병목현상이나 동맥경화증이 걸린다. 전세시장 수급불균형을 해소할 정책적 대안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다. 국회에서 발의된 주택임대차보호법개정안이 통과되면 임대 기간이 현행 최대 4년(2+2년)에서 9년(3+3+3년)으로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전세 매물 씨가 아예 마를 수 있다.

당장은 세입자 보호라는 명분이 있어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전세 시장 왜곡을 심화할 가능성이 크다. 임대차 2법이 보여주듯이 선의로 만든 제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시장 참여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부동산 시장은 참여자 간 되먹임(feedback)이 작용하기에 일방적이라는 개념은 통하지 않는다. 의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정책을 펴면 예기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한다.

정책은 '좋은 의도'가 아니라 '좋은 결과'를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돈과 물건을 거래하는 시장은 당위나 도덕보다 현실의 논리로 움직인다. 흐름(flow)의 중요성을 읽지 못한다면, 지금의 전세난은 언제든지 구조적 위기로 번져 매매시장까지 흔들 수 있다.​

ⓒ News1 양혜림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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