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때 무슨일이?
安 압박하는 文, 鄭에 압박당한 盧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 간 단일화를 둘러싼 논의가 달아오르면서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과정이 정가에서 집중적으로 복기(復棋)되고 있다.
먼저 상황과 환경의 유사성이 거론된다.
10년 전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지율에서 1위를, 사실상 무당파를 대변했던 정몽준 후보가 2위를,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3위를 달리고 있었다.
현재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다자대결구도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가운데 뒤를 이어 안철수 후보가 2위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과 다른 점이라면 문 후보는 제1야당 후보이지만 노 후보는 국민의 정부를 잇는 여당 후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야를 떠나 그때나 지금이나 보수정당인 새누리당(구 한나라당) 후보의 당선가능성이 가장 높았고 2,3위 후보간 단일화가 아니면 다자대결구도에서 선두 후보를 꺾을 수 없다는 점에서 환경은 비슷하다.
환경은 비슷하지만 18대 대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권후보단일화 논의를 살펴보면, 10년 전과 다른 점도 찾아 볼 수 있다.
당시도 이회창 후보의 우위 속에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간 단일화 논의가 진행됐지만 지금처럼 정당 밖 후보(안철수)가 정당 후보로부터 단일화 압박을 받기보다 오히려 정당 내의 노 후보가 소속 정당으로부터 압박을 받았다.
2002년 월드컵 열풍을 타고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정 후보의 인기가 치솟자 대선출마설이 솔솔 흐르더니 그해 9월 17일 대선출마를 선언한다. 역시 당시에도 정치권의 가장 관심사는 정 후보가 후보단일화에 나설 것이냐에 있었다.
그러나 정 후보는 같은 달 18일 "인위적으로 선거구도를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은 신중치 못한 것"이라며 "선거구도는 국민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하고 원하는 후보가 있으면 나오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일부 의원들은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의 3자구도가 되면 이 후보가 유리하다고 말하지만 꼭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결정은 국민이 현명하게 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지금의 "(단일화에 대해서는) 국민이 판단할 것"이라는 안철수 후보의 입장과 비슷해 보인다.
그해 추석이 지나자 민주당에는 위기론이 엄습했다. 9월 24일 열린 당 최고위원회의에서는 "추석민심은 당내 갈등과 분열을 하루빨리 정리하라는 것과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의원을 가능한 합치도록 하라는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실제 추석 이후 처음 나온 여론조사에서 이 후보와 정 의원은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한국갤럽이 추석 마지막날인 2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한나라당)-노무현(민주당)-정몽준(독자신당)-권영길(민노당)-이한동(독자신당) 5자 가상대결구도일 경우 이 후보가 31.3%, 정 후보가 30.8%의 지지율을 보여 이 후보가 근소한 우위(0.5%차이)를 지켰다. 노 후보는 16.8%에 그쳤다.
노 후보와 정 후보가 연합신당을 구성할 경우에는 정 후보가 연합후보로 나서면 43.9%를 얻어 34.9%의 이 후보에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고, 노 후보가 연합후보로 나서면 35.5%로 39.3%를 확보한 이 후보에게 뒤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노 후보는 그러나 당내의 단일화 압박에도 불구하고 "정 의원과 나는 걸어온 길, 함께 하는 사람이 다르다"며 "도저히 합쳐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갈라져야한다"고 일축했다.
노 후보는 단일화 압박을 정치개혁을 통해 돌파를 시도했다. 그는 단일화 압박이 최고조에 달한 9월 중순 "이 시대의 국민들은 정치개혁을 요구하고 있으므로 유신과 5공 유산은 포용할 수 없으며 민주세력 중 낡은 정치유산을 계속 주장하는 분들과는 논쟁하고 설득하고 싸워나갈 수밖에 없다"며 "하자는 대로 따라가는 것은 개혁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집권하면 2004년 총선 후 다수당에 총리지명권을 부여해 현행 헌법체계에서 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를 운용해본 뒤 2007년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연말 대선이) 지역구도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라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며 "정풍(정몽준 바람)도 지역바람이 아니라 개혁바람이며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의 바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누가 이것(정치개혁)을 진짜 해낼 수 있는가가 중요한데 보름 내지 한달 안에 국민 앞에 신뢰할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하고 실천함으로써 2차 노풍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했다.
문 후보가 안 후보와 정치개혁을 화두로 주도권경쟁을 하며 정치개혁논쟁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는 측면에서 볼 때 노 후보는 정치개혁을 통해 단일화프레임을 깨려는 시도를 한 것으로 읽힌다.
그러자 정 의원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여론조사상 3자대결보다 2자대결에서 (나에게) 좋은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후보단일화를 위해 노력하라고 조언하는 분이 많다"며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인 만큼 모든 가능성이 다 있다"고 말했다.
정 의원은 "후보단일화에 대한 최종판단은 국민이 할 일"이라고 덧붙여 기존 입장의 일관성을 살린 채 여론지지도 등에 의한 단일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장외에서 노 후보를 압박한 셈이다.
그해 10월 4일 노 후보가 선대위를 중심으로 당을 장악해 들어가자 당내 중도·비노파 소속 의원들은 '대통령후보 단일화 협의회(후단협)'을 만들어 노 후보를 압박해갔다.
후단협은 10월 7일까지 노 후보와 한화갑 대표에게 후보단일화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하고 그 결과에 따라 당무회의소집과 통합수임기구를 추진키로 했고, 또 당밖에 통합신당 창당준비위를 띄운 뒤 정 의원과 이한동 전 총리 등의 참여를 유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후단협에 참여한 의원은 34명, 후보단일화에 서명한 의원은 74명에 달했다.
김영배 회장은 후단협 발족식에서 "이상과 이념이 아무리 높아도 집권을 하지 못하면 백지"라며 "집권을 하고 정치개혁과 국가개혁을 위해서는 단일후보를 성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단협의 움직임과는 별도로 정 후보는 국민통합 21을 만들었고 여기에 민주당에 몸담았던 김민석 전 의원이 합류한다.
김 전 의원은 "후보단일화라는 명분과 정 의원의 당선 가능성이라는 현실 사이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고 탈당이유를 설명했다.
김 전 의원은 정 후보 캠프에서 총본부장을 맡아 김행 대변인과 함께 향후 후보단일화 협상을 이끌어내는 창구역할을 하게 된다.
정 의원은 10월 24일 강원지역을 방문해서는 "국민들의 뜻이 정몽준·노무현 후보단일화를 통해 이기는 것이라면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며 "여론조사를 보면 내가 단일후보로 되면 이길 수 있다고 나온다"고 자신을 중심으로 한 후보단일화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10월말 정 후보의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이에 노 후보는 31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 "정 후보 측이 진실 되게 단일화를 제안하면 선대위를 통해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종전의 '단일화 불가' 입장에서 선회한 것이다.
단일화 협상논의가 공식제기된 것으로 11월 3일이다. 노 후보는 "TV토론과 국민경선을 통해 후보단일화를 이뤄내자"며 "정 후보 측은 국민통합 21 창당일인 5일까지 확실한 입장을 표명해달라"고 요구했고, 정 후보는 이에 대해 "구체적 제안이 올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노 후보는 같은달 5일에는 "지난 국민경선 때의 16개 권역을 절반으로 줄여 2주안에 끝낸다면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후 민주당과 국민통합 21은 치열하게 단일화 방식을 가지고 힘겨루기를 하다가 ▲국민경선 ▲여론조사 ▲협상 담판 등 3가지로 의견을 좁혔고, 결국 21일밤 여론조사방식으로 단일 후보를 뽑기로 하고 22일 TV토론을 거쳐 24일 여론조사를 실시해 25일 노무현 후보가 단일후보로 등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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