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품격…공존 없는 성장, 지속 가능한가[이근면의 품격 몽상]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사람들연구소 이사장)
대한민국 경제는 지금 안녕하신지요? 반도체 호황에 명목 GDP 성장률이 연평균 10%가 넘고 1인당 국민 총소득도 4만 달러에 근접한다고 한다. 온통 장밋빛이다. 그런데 정작 가게 실질소득은 제자리걸음이고 자영업자 폐업은 100만 명을 기록하며 거리에는 온통 빈 상점에 '임대 문의' 현수막만 즐비하다.
시장이 어딘가에서 물꼬가 막혀 있는지, 아니면 두루 곳곳에 잘 흐르게 할 정책과 정치가 어딘가 정상적이지 않은지? 아쉽게도 국민은 안녕하지 못한 게 오늘이다.
결국 시장의 기능을 다시 살펴봐야 할 때다. 대표적 사례를 따라가 본다.
정치가 국가의 방향을 정하고, 행정이 그 방향을 현실로 구현하며, 입법이 사회의 규칙을 만든다면 시장은 국가의 활력을 창출하는 공간이다. 국민은 시장에서 일하고, 소비하고, 투자하며 삶을 영위한다. 기업은 시장에서 성장하고,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는 시장을 통해 사회에 확산한다. 결국 시장은 단순히 돈이 오가는 장소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삶이 연결되는 가장 역동적인 공간이다.
대한민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시장의 힘을 통해 성장해 왔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도 시장의 역동성과 국민의 도전 정신 덕분이었다. 기업은 새로운 산업을 개척했고, 노동자는 땀과 노력으로 생산성을 높였으며, 소비자는 시장을 통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 시장은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인공지능(AI)이 산업 전반을 바꾸고 있고, 플랫폼 기업은 전통적인 산업 구조를 빠르게 재편하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로 주문하고 결제하며, 몇 시간 안에 상품을 받아보는 시대가 됐다. 기술 혁신은 생산성을 높이고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며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쿠팡이다. 쿠팡은 대한민국 유통산업의 혁신을 상징하는 기업이다. 로켓배송은 소비자의 생활 방식을 바꿨고, 물류 시스템의 혁신은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수많은 협력업체와 일자리가 생겨났고, 소비자는 더 저렴하고 편리한 서비스를 누리게 됐다. 혁신이 국민의 삶을 개선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한다. 골목상권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한다. 전통시장과 동네 상점들은 대형 플랫폼과의 경쟁에서 밀려난다고 느낀다. 자영업자들은 매출 감소와 임대료 부담, 인건비 상승 속에서 생존 자체를 걱정한다. 플랫폼은 성장하는데 왜 많은 사람은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일까.
이 문제는 성장의 방식과 결과에 있다. 혁신은 반드시 기존 질서를 흔든다. 새로운 기술은 오래된 방식을 대체하고, 새로운 기업은 기존 시장의 구조를 변화시킨다. 산업혁명 당시 기계가 수공업을 대체했고, 인터넷은 오프라인 중심의 산업을 바꿨다. 오늘날 AI와 플랫폼 역시 같은 흐름 속에 있다.
따라서 혁신을 막을 수는 없다. 막아서도 안 된다. 세계는 이미 AI와 디지털 경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경쟁에 돌입했다. 대한민국이 성장과 번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혁신을 수용하고 새로운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혁신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도 위험하다. 시장의 목적은 단순히 승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장은 사회 전체의 번영을 위한 제도여야 한다. 혁신의 혜택은 누군가에게 집중되는 반면 변화의 비용은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될 수 있다. 플랫폼 기업의 성장 뒤에는 적응의 어려움을 겪는 소상공인이 있을 수 있고, AI의 발전 뒤에는 일자리 변화에 대한 불안이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혁신과 보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혁신이 사회 전체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기존 질서와 기득권을 합리적으로 절충하는, 전체 사회를 더 낫게 할 '착한 혁신'이 바로 그 길이다. 쿠팡이 옳으냐, 자영업자가 옳으냐의 문제로 접근하면 답을 찾기 어렵다. 혁신 기업은 성장해야 하고, 소비자는 더 나은 서비스를 누릴 권리가 있다. 동시에 변화의 충격을 받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제공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품격 있는 시장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혁신 기업이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으면서도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제공하는 시장이다. 경쟁은 치열하지만 규칙은 공정하고, 성공은 존중받지만 독점은 견제되는 시장이다. 누구나 노력과 능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살아 있는 시장이야말로 건강한 시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공정한 경쟁이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경쟁이다. 그러나 경쟁이 특권이나 독점으로 왜곡된다면 시장은 활력을 잃는다. 대기업이든 플랫폼 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동일한 규칙에 따라 경쟁해야 한다. 공정한 경쟁은 혁신을 촉진하고 소비자의 선택권을 확대하며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높인다.
둘째, 예측할 수 있는 규칙이다. 기업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어야 투자할 수 있다. 규제가 수시로 바뀌고 정책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흔들린다면 시장은 불확실성에 빠진다. 시장의 품격은 정부가 일관되고 예측할 수 있는 규칙을 제공하는가에 달려 있다.
셋째, 재도전이 가능한 사회적 안전망이다. 시장은 본질적으로 성공과 실패를 만들어낸다. 창업에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고, 산업 변화로 일자리를 잃어도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재취업할 수 있어야 한다. 품격 있는 국가는 시장의 경쟁을 인정하면서도 국민이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다.
결국 시장의 품격은 성장과 공존의 균형에서 나온다. 성장 없는 공존은 지속될 수 없고, 공존 없는 성장은 오래갈 수 없다. 혁신만 강조하면 사회적 갈등이 커지고, 보호만 강조하면 국가 경쟁력이 약화한다. 중요한 것은 두 가치를 조화롭게 연결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금 AI 혁명과 플랫폼 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앞으로 더 많은 산업이 재편되고 더 많은 직업이 변화할 것이다. 우리는 기술의 발전을 수용하되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함께 지켜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혁신이 존중받고, 노력한 만큼 보상받으며,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 성장의 열매가 특정 집단에만 집중되지 않고 더 많은 국민에게 기회로 연결되는 사회. 그런 시장이야말로 품격 있는 국가를 떠받치는 기반이 된다. 자칫 시장의 쏠림과 독점의 방관은 시장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독재와 같다.
국가의 품격은 정치와 행정, 입법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장이 얼마나 건강하게 작동하는가, 그리고 그 시장이 국민 모두에게 희망을 제공하고 있는가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다. 지금은 새로운 시대의 출항기다. 뉴노멀은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시장 질서의 생존전략'이어야 한다. 함께 '착한 혁신'의 새 길을 쫓아가는 사회적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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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가난한 나라는 아니지만, 성취에 걸맞은 존중과 신뢰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다. '품격 몽상'은 기업·대학·정부 현장에서 체감한 이 간극에서 출발한다. 이 시선과 시각에서 말하는 품격은 결과가 아니라 권한을 쓰는 방식, 규칙을 대하는 태도, 갈등을 조정하는 국가의 언어다. G3 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경제 규모가 아니라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운영의 품격을 갖추는 일이다. '품격 몽상'은 성장 이후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국격의 문턱을 사유하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