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주목! 당선자] "한 살때 지체장애, 열 살 때 시각장애 얻었지만 꿋꿋이 살아왔죠" 최동익 민주통합당 당선자
"복지는 기초, 이제는 장애인들도 문화를 누려야 할 때"
한 살때 주사를 잘못 맞아 지체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보조기가 없으면 두 다리로 서고 걷고 달리는 일은 불가능하다. 보조기를 써도 저는 다리는 어쩔 수 없다.<br>그로부터 9년 뒤인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앓고 있던 알레르기와 맞지 않는 약물을 복용한 게 원인이었다. 큰 물체는 볼 수 있지만 사람 얼굴과 글씨는 분간할 수 없다.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 않는다며 오해를 받기 일쑤였다. <br>중복 장애를 지닌 채 살았지만 삶을 포기한 적은 없다. 그 결과 장애인 대표로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지체장애 3급과 시각장애 2급을 안고 살아온 최동익 당선자의 이야기다. 최 당선자는 민주통합당 비례대표 2번으로 19대 국회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br>최 당선자는 30일 뉴스1과의 통화에서 "새끼 손가락에 가시가 박히면 본인에게는 그것이 가장 크고 힘든 아픔일 수 있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역경이 아닐 수 있다"며 "역경은 상대적인 것이며 극복가능한 것이지 좌절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굴곡진 삶을 50년 동안 그가 어떻게 버텨왔는 지를 함축적으로 드러낸 말이다.<br>비장애인들과 함께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기술을 배우는 서울맹학교에 입학해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그는 "사춘기였던 그 당시 눈은 안 보이고 대학에는 가야하는데 학교는 실업계라 대학진학 과목을 가르쳐주지 않아 참 막막했다"며 "학원에 가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거나 봉사자들이 읽어주고 가르쳐주는 것을 듣고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학창시절을 떠올렸다.<br>그에 따르면 그와 함께 졸업을 했던 동창생들은 모두 27명이었으며 이중 단 5명만 대학에 진학했다. 이 중 한명이 그였다. 그는 숭실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수석으로 졸업했다.
대학시절을 어떻게 보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학시절은 고교 때보다 더 힘들었다"고 말했다. 당시만해도 지금처럼 점자책이 많이 보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를 하려고 해도 책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br>더군다나 대학의 전공서적은 고교 때의 그것과는 두께도 다르고 내용의 깊이 또한 달랐기 때문에 공부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는 "한 친구에게만 부탁을 하기 미안해 봉사자들을 확보해 나가는 데 공을 들였다"라며 단순한 공부차원을 넘어 부수적인 요인들까지 살펴야 했던 당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공부에 이렇게 많은 품을 쏟은 이유는 '먹고 사는 문제'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취업을 준비하지만 그가 대학을 입한한 80년대만 해도 대학만 졸업하면 취업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의 또래들은 그 당시 먹고 사는 문제 대신 시대를 고민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br>이렇듯 꿈과 낭만을 포기하고 먹고 사는 일에 몰두했지만 그의 취업성적은 최악이었다. 그는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어 대학원엘 갔고 대학원을 졸업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유학을 갔지만 유학을 다녀와서도 나는 일자리가 없어 놀아야 했다"며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만인 95년에야 일자리를 구한 사연을 전했다.<br>그가 들어간 곳은 한국맹인복지연합회였다. 그는 "나도 일자리를 얻었다, 직업을 가졌다라는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워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며 당시를 추억했다. 어렵게 얻은 일자리인만큼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1년만에 과장에서 사무국장으로 승진했다.<br>사무국장으로 일하며 그가 가장 신경을 썼던 일은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성을 높여주는 사업이었다. 그 방법은 시각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다른 복지관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점자책을 만드는 일에 전념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점자책에 한이 맺혔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개인적으로 노래를 좋아해 헨델과 바흐처럼 중도에 실명한 음악인들이나 스티비 원더, 전재덕 처럼 눈이 보이지 않아도 멋진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처럼 맹인들도 음악을 즐기고 연주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br>최 당선인은 "세종대왕 때 우리나라에는 '관현맹인'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관현맹인은 시각장애인 악공들로 구성된 악단이다. 그는 "이 제도를 본따 문광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아 전통예술단원들을 모집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음악과 장애인들의 정보접근성 향상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그는 '19대 국회에 들어온다면 어떤 상임위원회에서 활동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를 들었다.<br>문방위는 인기가 높은 상임위로 의원들 간의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이를 의식했는지 그도 "보건복지위원회는 복지의 기초이기 때문에 2년 동안은 여기서 열심히 준비를 하고 하반기 국회에서는 문화복지를 이룩할 수 있는 문방위로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장애인운동만 20여년 간 해온 그는 "내가 그동안 정부나 국회에 요구해왔던 것들을 이제는 집행해야하는 입장이돼 책임감이 무겁다"며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것 뿐 아니라 장애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데도 많이 신경을 쓸 예정"이라는 뜻을 내비쳤다.<br>마지막으로 그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자신의 좌우명을 소개했다. 그는 "고교 때부터 그냥 최선을 다하고 살자, 결고는 하늘의 뜻에 맡기자는 신념으로 살아왔다"라며 "국회의원이라는 자리도 결과에 연연하기 보다는 최선을 다해 그저 내가 살아온 대로 국민의 뜻에 맞게 전념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br>△서울(50) △서울맹학교, 숭실대 △한국맹인복지연합회(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 사무국장 △노무현 대통령 후보 국가비전 21 장애인 담당 선거대책본부 수석부위원장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자문위원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사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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