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당 규약서 선대 지우고 대남·통일노선 삭제…'김정은 당' 완성(종합)
선대 업적·'위대한 수령' 표현 정리…김정은 총비서 권한은 구체화
'평화통일·민족대단결·남조선' 삭제…'전시' 조항 사상 처음 신설
- 김예슬 기자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북한이 노동당의 통치 이념과 방식을 규정한 당 규약에서 김일성·김정일 등 선대 지도자들의 업적과 상징적 표현을 대거 삭제하고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의 권한을 구체적으로 명문화한 것으로 3일 확인됐다.
아울러 '남북 적대적 두 국가' 노선에 맞춰 '남조선 혁명론'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등의 표현을 삭제하며 기존 대남·통일노선도 걷어냈다. 여기에 처음으로 '전시' 관련 조항까지 신설하면서 김정은 체제에 맞춘 통치 규범 재정비를 사실상 마무리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은 이날 오전 서울 중구 컨퍼런스하우스 달개비에서 '북한의 제9차 당 대회 개정 당 규약 분석 및 북한 정세 평가' 기자간담회를 열고 지난 2월 제9차 노동당 대회에서 개정된 당 규약의 분석 결과를 설명했다.
이번 개정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선대인 김일성 주석·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업적 기록과 상징성을 줄이는 대신 김 총비서를 중심으로 당의 성격과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조치들이 명문화됐다는 점이다.
개정 당 규약 서문에는 기존 28개 문단 가운데 김일성·김정일의 업적과 '위대한 수령' 등 선대의 상징성을 담은 2개 문단이 삭제됐다.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당의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규정한 기본 틀은 유지했지만, 선대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찬양하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대신 '조선노동당은 수반을 중심으로'라는 표현과 김정은 집권 이후 확정된 '5대 당 건설노선'을 새로 반영했다.
전략연은 이를 김 총비서가 김일성·김정일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확보하는 단계를 넘어 독자적인 수령 지위와 상징성을 구축하는 이른바 '김정은 노동당' 구축의 과정으로 평가했다.
특히 정치국회의와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사회할 수 있고 당의 중요 간부를 직접 임면할 수 있거나, 당원·후보당원의 입당과 출당, 당 조직 및 당 기관 부서 해산 권한 등 사실상 김 총비서가 그간 행사해 온 권한을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그의 통치 방식에 정당성과 권위를 더 부여하는 방식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전략연은 "사회주의 정상국가를 지향하고 법에 근거한 통치를 강화하는 측면도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권위주의적 측면도 강하다"며 "당 규약과 헌법이 총비서와 국무위원장(김정은)의 권한을 구체적으로 강화하는 방향으로 일치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대남·통일 분야에서는 '두 국가' 노선에 따른 변화가 보다 분명해졌다.
북한은 당 규약 서문에 있던 '남조선 혁명론'과 '통일전선' 관련 과업을 전면 폐기하고 '조국의 평화통일', '남조선', '민족대단결', '전국적 범위' 등 통일·민족 관련 표현을 삭제했다. '민족자주'와 '민족의 공동 번영' 등 남북을 하나의 민족으로 전제한 표현들도 사라졌다.
통일노선과 연계돼 있던 미국 관련 표현도 함께 없어졌다. 기존 규약에 있던 '미제의 침략무력을 철거시키고', '조선에 대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를 끝장내며' 등의 문구가 삭제됐다. 이는 기존 대남혁명론 아래 남측에서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외세의 영향력을 제거한다는 논리가 통일 노선 폐기와 함께 규약에서 빠진 것으로 풀이된다.
이 같은 변화는 제9차 당 대회에서 처음 이뤄진 것은 아니다. 북한은 2024년 6월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10차 전원회의에서 당 규약을 개정해 대남·통일전선 관련 내용을 먼저 삭제했고, 이번 개정에서 이를 유지했다는 것이 전략연의 판단이다. 이후 지난 3월 헌법에도 두 국가 기조를 반영하는 개헌을 단행해 이를 당·국가 통치규범에 반영하는 작업을 사실상 완료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이 당 대회나 최고인민회의 등에서 사용하는 '적대적 두 국가'라는 표현 가운데 '적대적'이라는 단어 자체는 당 규약이나 헌법에 명문화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전략연은 "북한 나름대로 '두 국가 원칙' 아래 향후 남북 관계에서 최소한의 접점을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남겨놓으려는 의도일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대남·통일노선을 삭제한 것과 맞물려 당 규약에 처음으로 '전시' 관련 조항이 들어간 점도 특징이다.
개정 당 규약은 제15조에 당 지도기관 성원의 전시 활동 원칙을, 제27조에는 정치국의 전시 권한을 각각 신설했다. 역대 노동당 규약에 '전시' 관련 별도 조항이 명문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거에는 '조국보위'나 '조국통일', '조국통일대사변' 등 간접적인 표현만 사용됐다.
구체적으로 새로 임명된 책임간부가 당 지도기관 성원이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후보자 등록 및 전원회의 선거 절차를 전시에는 생략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정치국에 전시에 중요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쉽게 말해 유사시엔 간부들의 인사 문제를 평시와 같은 절차 없이도 처리할 수 있으며, 이는 노동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이 담당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전략연은 이를 김정은 총비서의 유고 등 비상 상황에서 위기관리 지휘체계 공백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로 평가했다.
김인태 전략연 수석연구위원은 "전시의 '당적 지도 관행'을 규약에 성문화한 것으로 평가한다"며 "유사시 당 중앙위원회를 대체하는 정치국 중심의 국방 지휘체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남조선 혁명론과 통일론 등 '두 국가'와 관련된 내용들이 노동당 규약에서 삭제된 상황에서 전시 조항이 들어갔다"며 "전쟁 대비의 상시화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라고도 평가했다.
당 조직과 당원 관리 체계도 손질했다. 노동당 입당 가능 연령은 기존 18세에서 20세로 높였다. 출당자의 경우 3년 이상 노동단련과 혁명화 등 조직과 군중의 검증을 받도록 하는 규정을 신설했고, 당원 처벌에는 '견책'과 '사업정지'를 추가했다.
전략연은 입당 연령 상향을 김 총비서의 딸 주애의 후계 구도와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1956년 제3차 당 대회 때 전쟁 이후 부족한 당원을 확충하기 위해 입당 연령을 20세에서 18세로 낮췄지만, 그 이후에도 실제 입당은 통상 20대에 이뤄져 왔다는 게 전략연의 설명이다. 최근 12년제 의무교육 도입에 따라 졸업 연령이 높아지고 노동연령과 선거연령 등도 잇따라 상향된 만큼 이번 조치 역시 실제 사회제도와 입당 기준을 맞추는 '현실화'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전략연은 "김주애가 18세에 입당하느냐 20세에 입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며 "김정은 총비서는 앞으로 장기간 집권하면서 주애가 충분한 후계 준비 기간을 거치는 것을 중시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전략연은 이번 개정을 통해 김 총비서 집권 이후 이어진 당·국가 통치규범의 재편 작업이 일단락된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현재로서는 김정은 체제의 성격에 맞게 전반적인 통치 규범을 바꿨다는 의미가 있다지만 장기 집권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당 규약이 추가로 개정될 가능성도 있다"라고 예상했다.
yeseu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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