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김일성 사망 : 첫 북핵 위기 때 우리가 배운 것[남북은 그때]

지미 카터 전 美 대통령, 방북으로 남북 첫 정상회담 급물살
김일성 사망 후 북핵 개발 본격화…이념 갈등으로 풀지 못했다

편집자주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고 한다. 하지만 북핵 위기와 이념 갈등, 대화와 반목을 반복한 남북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때 이랬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남북이 놓친 '극적인 순간'으로 돌아가, 오늘의 위기를 기회로 되돌릴 지혜를 탐구해 본다.

김일성 주석 사망 관련 주요 신문의 1면 보도.(출처 국가기록원)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시설 사찰 거부로 시작된 1차 북핵 위기는 미국의 '북한 폭격 계획'으로 전쟁 직전까지 비화하며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를 한반도에 불러왔다.

전쟁을 막아보려는 미국의 노력은 사상 첫 대북 특사로 이어졌다. 1994년 6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빌 클린턴 대통령의 특사로 방북했다, 전직 대통령이라는 비중 있는 인사의 방북이 타진되자, 북한도 전례 없는 수준의 호응을 보이며 한반도에 빠르게 대화 국면이 전개됐다.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 급물살…김일성 사망으로 '원점 회귀'

카터 전 대통령은 그해 6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평양으로 향했고, 다음날인 16일 김일성 주석과 첫 만남을 가졌다. 카터 전 대통령의 '평양행'으로 전쟁 위기가 북미 대화와 남북 정상회담으로 전환되며 순식간에 정세가 바뀌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에게 '조건 없이 언제 어디서든'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싶다는 김일성 주석의 의사를 전달했다.

정부는 6월 20일 북한에 전화통지문(전통문)으로 정상회담의 실무 논의를 위한 부총리급 접촉을 제의했고, 북한이 사흘 만에 호응하며 28일에 예비접촉이 성사됐다. 이를 통해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남북의 정상이 분단 이후 최초로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994년 6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하는 모습.(출처 국가기록원)

그러나 1994년 7월 9일 충격적인 뉴스가 전해졌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는 북한의 '중대 보도'였다. 북한에 따르면 김 주석은 하루 전인 8일 새벽 2시에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격무로 사망했다는 분석도 나왔지만, 북한 내부에서 정상회담을 반대하는 세력의 '공작'이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좌우지간 역사적인 남북 정상의 첫 회담은 허망하게 무산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즉각적으로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청와대에서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갑작스러운 정권의 혼란으로 북한 군부의 '오판'이 발생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정부는 당시 "어떠한 사태에도 국민의 안녕을 보호할 수 있는 대책이 마련돼 있다"라고 밝혔지만, 국내 여론은 요동쳤다. 다행히 급변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북한을 바라보는 불안한 국민의 시선으로 정상회담이 불러온 평화의 기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북한에 어떤 메시지를 전파할 것인지를 두고 정치권과 정부 내의 의견도 크게 엇갈렸다. 야당 측에선 정상회담까지 합의한 바 있으니 남북관계 개선 및 민족 화해 차원에서 조문단 파견이나 최소한의 조의 표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일부 재야·시민단체에서 실제 '민간 조문단 파견' 준비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을 위험하게 바라보는 여론을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김 주석의 후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성향과 의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섣부르게 대화와 평화의 메시지를 냈다간, 정부의 지지율이 곤두박질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정부와 여당은 "조전 및 조문단 파견은 절대 불가"라는 입장을 굳혔다. 심지어 '6·25 전범'에게 조문은 있을 수 없다는 강경한 목소리도 나왔다. 이영덕 당시 국무총리는 7월 18일 국무회의에서 김일성 주석을 "동족상잔의 전쟁을 비롯한 불행한 사건들의 책임자"라고 규정하며 조문 여론에 공식적인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조문을 주장하는 이들에겐 친북'·'주사파' 혹은 '북한 동조 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혔고, 조의 표명이나 조문 시도가 처벌 대상이 되기도 했다. '공안 정국'의 부활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4년 7월 9일 청와대에서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모습. 이날 국무회의에는 이영덕 국무총리, 최형우 내무부 장관, 이홍구 통일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출처 국가기록원)
그때 조문이 이뤄졌으면…북핵은 사라졌을까

북한도 가만있지 않았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논평으로 "남조선 당국이 조문단 파견을 가로막고 조전·조의는 고사하고 애도의 뜻조차 표시하지 않은 것은 상식 이하의 불손하고 무례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조문 파동'으로 남북관계는 빠르게 냉각됐다. 정상회담을 통한 한반도 평화, 북핵 폐기의 청사진은 사라지고, 남북의 냉전적 대치가 심화했다.

1990년대 초중반의 한국 사회는 북한을 옹호하고 북한의 입장을 우리 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김일성 조문=김일성 미화'라는 프레임은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유효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조문이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정부가 국제사회의 관례를 차용한 '최소한의 조의'라도 표했으면 남북이 좀 더 빠르게 대화의 폭을 넓히고, 북핵 위기를 조기에 종식할 수 있었을까?

카터 전 대통령을 보냈던 미국이 이 사안에 좀 더 개입했다면 어땠을까? 2018년 북미 정상회담이 비핵화 협상으로 이어지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손짓하는 지금의 상황이 좀 더 빠르게 실현됐을까?

1994년을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만 기억하기에는 놓친 순간이 너무 많다. 김 주석의 사망 이후에도 북미는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라는 북핵 해결을 위한 첫 합의를 도출하는 등 대화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제네바 합의로 북한은 영변 원자로를 동결하고 미국은 경수로와 중유를 북한에 지원하기로 하는 등 오늘날 논의되는 북핵 협상의 기본 틀은 이때도 유효했다. 그때 한국이 조금 더 상황 관리를 할 수 있었다면, 그래서 북미 대화가 더 활발하게 진행되고 우리가 개입할 여건이 넓어졌다면, 오늘의 북핵 위기는 어떤 상황이었을지 궁금할 뿐이다.

오인환 공보처 장관이 1994년 7월 9일 김일성 사망에 대한 정부대책을 발표하는 모습.(출처 국가기록원)

somangchoi@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