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병 은폐'에서 영웅화로…'전투위훈기념관'이 드러낸 북·러 새 서사
'희생의 영웅화'로 정권 결속 강화
북러관계, 전략적 실리 추구 넘어 '혈맹 서사'로 발전
- 김예슬 기자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북한이 러시아 파병 군인을 기리기 위한 '전투위훈기념관'을 설립한 것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북·러 군사 협력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완결판'을 만든 것이라는 분석이 26일 제기된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24일 자 보도에서 해외군사작전 전투위훈기념관 건설 착공식이 23일에 열렸으며,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파병군을 추모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공간이 새로 생긴 것인데, 이는 이번 러시아 파병이 한국전쟁에 버금가는 북한 체제의 정통성을 부각하는 이벤트였음을 시사하는 대목으로 보인다.
신문은 전투위훈기념관이 "형제적인 로씨야(러시아) 연방의 꾸르스크(쿠르스크)주를 해방하기 위한 군사작전에서 공화국 무력의 전투원들이 피와 목숨으로 쌓아 올린 전과와 혁혁한 군공은 주체의 건군사와 반제 혁명 투쟁사에 특기할 기적의 승전 신화"라면서 "피로써 맺어지고 더욱 공고화하는 조로(북러)관계의 불패성을 과시하고 두 나라의 존립과 발전, 무궁 번영의 초석에 고여진 거대한 공적"이라고 표현했다.
김 총비서도 이날 연설에서 전투위훈기념관 건설에 북러관계 강화라는 외교적 판단도 내포돼 있음을 부각했다. 그는 "정의와 부정의의 대결은 날로 첨예해지고 지배와 폭제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지만, 혈전 속에서 더 억세게 단합된 조로(북러)관계의 전진은 가로막을 수 없다"며 "평양은 언제나 모스크바와 함께 있을 것이며 우리의 친선 단결은 영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기념관 건립을 결정하고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은 러시아 파병을 '은폐 대상'에서 '영웅적 위훈'으로 격상하려는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북한은 이를 통해 내부적으로 러시아를 지원하는 데 동참하는 것이 곧 명예로운 일이라는 내러티브를 주입하고, 외부에는 북·러 간 군사 협력이 단순한 '거래'가 아니라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혈맹임을 과시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초 러시아를 돕기 위해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대를 파병했다. 북한은 국제사회를 통해 드러난 각종 '증거'에도 불구하고 6개월 가까이 파병 사실을 인정하지 않다가, 지난 4월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입장문을 통해 처음으로 파병을 공식 인정했다.
이후 북한의 태도는 파병을 숨겼던 앞선 6개월과 180도 달라졌다. 그간 외신을 통해만 알려졌던 참전 실태를 자국 매체에서 직접 보도하며, 전투 사망자를 '국가적 영웅'으로 재규정했다.
8월에는 김 총비서가 러시아 파병 장병들을 직접 만나 국가표창을 수여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등 파병자들을 각별히 챙기는 모습을 선전했다. 최고지도자가 직접 전사자의 관을 맞이하는 장면을 공개하며 '희생의 영웅화'를 추진했다. 이번 전투위훈기념관 설립도 그 서사를 제도화해 항구적인 정치 선전 장치로 만드는 단계로 풀이된다.
아울러 북한은 국제사회에서의 입지 강화와 외화벌이를 위해, 즉 정권의 이익을 위해 단행한 파병을 러시아와의 '전우애'와 '동맹의 상징'으로 미화하고 있다. 이는 이익의 실체인 군사 거래(무기·병력 제공에 따른 반대급부 제공)가 불러올 비난을 희석하는 한편, 파병군의 사기 저하를 방지하고 정권 결속을 강화하려는 효과를 노린 조치다. 통일부도 이번 위훈기념관 건설을 "체제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는 목적이 분명히 있다"라고 평가했다.
김 총비서는 착공식 연설에서 "조로(북러) 두 나라 관계가 한 전호에서 피를 주고받는 가장 높은 신뢰 관계로, 생사 운명을 같이하는 제일로 진실하고 공고한 불패의 관계로 더욱 승화된 전투적 단결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라고 양국 관계를 재차 규정했다.
이는 러시아와의 관계가 서로 실익을 주고받는 거래적 관계를 넘어 혈연적 동맹 수준으로 격상했다는 메시지를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전투위훈기념관은 러시아 파병 부대의 희생을 '인민의 명예로운 의무'로 재정의하는 기능을 하면서, 향후 양국이 추진할 군사·경제 협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될 가능성이 크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 총비서의 연설에는 러시아와의 '피로 맺은 동맹'을 국가 정통성의 새 축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깔렸다"며 "70년 전 중국과의 혈맹을 계승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와의 혈맹 관계를 국가를 끌어가는 하나의 중심 기둥으로 설정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yeseu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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