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닮은 한반도…반세기 만에 소환된 동·서독의 '두 국가' 공방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물과 불이 융합될 수 없듯이 자주정치와 사대매국정치가 합치될 수 없고, 자위국방과 종속국방이 병합될 수 없으며, 자립경제와 식민지 하청경제가 결합할 수 없고, 사회주의 문화와 양키 문화가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뻔한 이치입니다."

북한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는 지난 20~21일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14기 13차 회의 연설에서 남북관계를 '물과 불'에 비유했다. 이는 54년 전인 1971년 동독의 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제시한 '물과 불의 이론'을 고스란히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독은 당시 서독으로의 흡수병합 사태를 막고자 '물과 불의 이론'에 따른 '통일 불가 정책'을 추진했다.

동독은 발터 울브리히트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 집권한 1960년부터 1971년까지는 '서독 합병론' 기조를 유지하다 호네커의 등장 뒤 기조를 바꿨다. 호네커는 1976년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제9차 전당대회에서 파격적으로 당 강령 중 '독일 통일' 조항을 삭제했다. 동시에 동독에는 '사회주의적 민족'이, 서독에는 '자본주의적 민족'이 존재한다면서 독일의 민족성까지 새로 규정했다.

이는 '2민족 2국가' 체제를 통해 동서독의 분단을 유지해 권력을 지킨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동독은 서독과의 체제 경쟁에서 불리함을 감지한 뒤부터는 서독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동독의 결속을 위해 자본주의의 폐해를 집중적으로 선전했다. 또 베를린을 봉쇄하고 베를린 장벽을 구축하는 등 '분리·차단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이는 북한이 2023년 말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 관계'라고 새로 규정한 뒤 단행한 일들과 비슷하다. 북한은 지난해부터 남북 접경지에 길고 거대한 방벽을 설치하기 시작했고, 남북을 잇는 경의선과 동해선 연결도로와 철도를 폭파하는 '단절 조치'를 취했다. 내부적으로도 각종 통일·민족 관련 개념을 지우는 새로운 프로파간다를 선보이고 있다.

김 총비서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남북한의 '본질적 차이'를 언급하면서 한국이 1948년 이승만 정부 때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3조를 만든 것을 지적했다. 그는 이것이 "우리 국가에 가장 적대적인 (한국의) 태생적 본성을 성문화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한국은 명백하게 이질적이며,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의 국가임을 국법에 고착시키겠다"라고도 주장했다. 장기화한 분단과 서로 다른 체제로 인해 남북이 '서로 다른 민족'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전 총리는 동독에 앞서 1969년부터 '1민족 2국가'를 주장했다. 독일 내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동서독은 '특수한 관계'이며 분단이 독일 민족의 단일성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관점이다. 그는 독일 민족의 자결 원칙에 의해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단계적 접촉 확대'가 더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봤다.

이는 최근 정부의 대북 기조와 닮았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남북이 국제법적으로 보나 현실적으로 보나 '실재하는 두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북한이 주장하는 '적대적'이 아닌 '평화적' 관계로 바꿔야 하며, 이는 정부의 공식 통일 방안인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두 번째 단계인 '국가 연합 단계'와 비슷하다는 것이 정 장관의 생각이다. 남북관계가 후퇴한 것이 아니라 '통일로 가는 과정'에 있다는 '역발상'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정 장관은 최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과거 서독의) 브란트 정권도 동방정책의 '두 개 국가론'을 바탕으로 동독과의 교류 협력을 진행했다"며 "결국 두 개 국가의 제도화에서 파생된 교류 협력의 성과가 통일로 이어졌다는 점을 우리도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대북 정책이 동서독의 통일 과정을 모델로 삼았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측의 체제를 존중한다"라며 정부가 남북관계를 '특수한 두 국가 관계'로 설정할 것임을 시사하기도 했다.

동독과 서독은 1972년 '2민족 2국가'와 '1민족 2국가'의 중간 지점을 설정한 것으로 평가되는 '동서독 기본 조약'을 체결한다. 그 이후 교류가 확대되며 갈등이 완화했고, 1973년에는 동서독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기도 했다. 이후 1989년 동독의 평화혁명과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쳐 1990년 화폐·경제·사회 통합과 통일조약 등을 통해 통일을 달성했다.

1991년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고, 같은 해 △상호 체제 인정 △내정 불간섭 △상호 비방중상 중지 △상호 체제 전복 시도 중단 등의 내용을 담은 '남북 기본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했던 것을 보면, 남북과 동서독은 분명 비슷한 역사를 겪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동독의 '2민족 2국가론'이 서독의 '1민족 2국가론'에 기반한 정책적 공세에 대한 방어 차원의 주장이었다는 것은 한반도의 상황과 차이가 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이 먼저 공세적 두 국가론을 제기하고 한국이 이를 방어하는 듯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동서독의 '두 국가론'은 결국 통일로 이어지는 과정 중 하나가 됐지만, 한반도의 '두 국가론'은 남북의 거리를 계속 벌리는 듯하다.

한 대북 전문가는 "동독의 '2민족 2국가론'과 북한의 '남북 두 국가론'은 그 의도로만 봤을 때는 같은 선상에 있는 주장으로 보인다"면서도 "독일의 경우 동서독의 교류협력이 이미 활발했던 때에 동독이 흡수통일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며 새로운 이론을 제시한 것인데, 한반도에서는 남북 간 교류협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북한의 주장이 나왔기 때문에 분명한 차이는 있다"라고 짚었다.

또한 북한이 독일과 달리 '민족'이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실제 김 총비서는 이번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민족'이라는 단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서는 북한이 '김일성 민족' 등 내부용 민족 개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여 한국을 상대로 한 적대적 정책 추진 과정에서 있어 민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자신들이 정통성이 있는 민족이라는 주장을 강화하는 것이 낫다는 게 북한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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