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지는 '韓 패싱' 우려…북미 대화 트랙에 없는 '페이스메이커'[한반도 GPS]

남북 대화는 막혔는데 북미 대화는 시동…한국 존재감은 '흐릿'

편집자주 ...한반도 외교안보의 오늘을 설명하고, 내일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한 발 더 들어가야 할 이야기를 쉽고 재밌게 짚어보겠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의 불씨가 재점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사실상 멈춰 섰던 북미 정상외교가 7년여 만에 재개될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최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와의 대화 의지를 거듭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 총비서와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직접 소통 가능성을 열어두는 모습입니다. 집권 1기 때 세 차례나 김 총비서와 만났던 트럼프 대통령에게 '톱다운' 방식의 북미 외교는 낯선 선택지가 아닙니다.

북한의 태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미국이 비핵화를 요구하는 한 대화에 나설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은 확고하지만, 김 총비서의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 총비서의 '개인적 관계'는 훌륭하다고 추켜세웠습니다. 미국이 달라진 북한의 핵보유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미국을 대화 상대에서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한국을 향한 태도와 온도 차가 뚜렷합니다.

아직 북미 대화 재개를 기정사실화하긴 이릅니다. 고도화한 북한의 핵능력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지, 북한과 '역대급' 밀착을 하는 러시아와, 다시 '혈맹' 관계를 복원해 가는 중국도 상대해야 합니다. 8년 전 비핵화 협상 때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했던 중국과 러시아의 존재감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입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8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2026.8.15 ⓒ 뉴스1 이재명 기자

이재명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남북 간 긴장을 낮추는 조치를 취하면서 북한을 다시 대화의 장으로 불러내겠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보내고 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반도 문제에서 미국이 먼저 '피스메이커'로 나서 북한과의 대화를 주도하면, 한국은 북미 간 대화를 촉진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도 내놨습니다.

최근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남북 간 신뢰 회복과 대화 복원뿐 아니라 '오래된 전쟁'을 끝내기 위한 당사자 간 논의를 시작하고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해 나가자는 보다 큰 청사진도 제시했습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우선 멈추게 하고 이를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현실적인 접근법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미국에 북미 대화 재개 필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중국에도 북한이 대화에 복귀할 수 있도록 건설적인 역할을 해달라고 수시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좀 묘합니다. 북미 대화를 위해 서울이 가장 분주하게 뛰는데, 평양으로 향하는 길은 워싱턴D.C. 에서 먼저 뚫리는 듯합니다. 정작 서울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은 굳게 막혀 있습니다.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 가능성에는 최소한의 여지를 남겨두면서도 한국을 향해서는 좀처럼 틈을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고 대북전단 살포 차단에 나서는 등 긴장 완화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했지만 북한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북한이 2023년 말부터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한 이후 한국을 아예 외교적 협상의 상대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흐름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김여정 부장은 전날인 20일 밤 담화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이중적 언행'을 하고 있다면서, 직함 및 존칭 없이 실명을 거론하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미 연합연습 축소로 한국이 '전쟁 놀음'을 못하게 됐다는 조롱도 가했습니다.

2018년 비핵화 협상 때 한국은 비핵화 협상을 촉진하는 역할을 꽤 비중 있게 해냈습니다. 두 번의 남북 정상회담과 한 번의 남북미 정상 회동 등이 1년 반 사이에 열렸습니다. 서울이 평양의 의중을 워싱턴에, 워싱턴의 메시지를 평양에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모든 소통 채널이 지금은 막혔습니다.

'페이스메이커'가 과연 적확한 위치에 있는지 생각해 볼 시점입니다.

페이스메이커는 마라톤 주자 바로 옆이나 앞에서 밀고 당기며 주자가 목표로 한 기록을 내기 위해 돕는 가장 밀접한 조력자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미국, 북한과 같은 트랙에 서 있지 않은 듯합니다. 미국과 북한은 한국에 말을 걸지 않고 '직거래'를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 패싱'이라는 우려스러운 상황이 현실화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상대는 '톱다운 외교'를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총비서입니다. 두 정상이 모두 인정하고 있는 '개인적 관계'가 다시 북미 대화의 동력으로 작용한다면 상황은 예상보다 급하게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제자리에 있지 못하다면, 한국은 페이스메이커가 아니라 패싱을 당해 북미의 뒤를 쫓는 추격자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북미 대화의 결과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가 중단되는 등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줄일 수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노력 없이 남의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는 것이 외교의 본질입니다. 한국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를 멀리서, 혹은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상황은 피해야 합니다.

yeseul@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