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로 문 앞에 온 북한 물품…분단의 현실을 감각하다[155마일]
반재하 시각 예술 작가 인터뷰
- 유민주 기자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북한 물품을 주문해 집 앞에서 받아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한국 세관을 통과해 문 앞에 놓인 '북한'을 마주하는 순간, 그동안 추상적으로만 인식해 온 분단의 현실이 감각적으로 다가온다. 이 낯선 경험을 전시로 풀어낸 이가 있다.
뉴스1은 지난 2일 서울 성북구에서 전시 '방금 전의 소문과 오래된 증거로부터'를 진행 중인 반재하 작가를 만났다. 반 작가는 "저의 관심사는 북한 그 자체이기보다는, 북한 물건들이 들어오면서 거기에 반응하는 정부 기관들의 모습들이다. 관객들도 전시를 통해 북한 물건을 감각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생경함'을 느껴보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반 작가가 북한 물품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2018년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인터넷 쇼핑을 하다가 미국의 주문 제작 쇼핑몰에서 인공기, 북한 선전 문구가 새겨진 머그잔과 티셔츠 등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51점을 주문했지만, 며칠 뒤 세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부분은 기존 상품에 북한 이미지를 인쇄한 수준이었는데, 일부 물품에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문구가 있었어요. 세관에서 '왜 이런 걸 샀느냐'며 사유서를 요구했고, 이후엔 국가정보원에서도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술가로서 작업 차원에서 수집한 거라 설명했죠."
세관 특별수송팀은 "예술가의 의도는 존중하지만 북한 관련 물품은 시기상조"라며 일부 물품의 통관을 보류했다. 하지만 절차가 엉성해 보이는 장면도 있었다. 최종적으로 배송된 물품을 뜯어 보니 보류하겠다는 물건과 통과된 물건들이 뒤섞여 있었다. 엄밀한 절차를 거쳤다고 생각했는데, 점검의 결과는 예상과 달리 허술해 보였다.
"저한테는 '분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첫 번째 사건이었어요. 이 사건을 계기로 분단 체제가 개인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과 모순을 느꼈어요.그 과정에서 겪은 관세사무소·국정원·세관의 퍼포먼스적인 대응을 캐나다 문학 비평가가 유형화한 희극의 전형적인 캐릭터에 비유해 그들의 공무 집행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전시 '따뜻한 전쟁'에서 55일간의 실랑이 끝에 한국에 들여온 작품, '무제(물건들)'가 전시됐다. 이 작품은 머그잔 15개, 스티커 13개, 티셔츠 8벌, 토트백 4개, 베개 1개, 텀블러 1개, 골프공 세트 1개, 비닐봉지 1개, 상자 4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존에 통관이 금지됐던 선전화 등은 흐림 처리를 통해 전시했다.
아울러 '허풍선이, 촌뜨기, 익살꾼'은 세관·국정원·관세사의 반응을 유머러스하게 비튼 영상 작업이었다. 해당 작품 전체에서 '남한이라는 무대', '국가보안법이라는 장막', '38선이라는 제4의 벽이 있는 연극'이라는 함의를 내포했다.
앞선 작업의 연장선으로 신작 '부재 시 픽션은 문 앞에 놔주세요'는 주문된 북한 물건들이 한국에 도착하기 직전 통과해야 하는 왜곡된 네트워크를 추적한 결과물이다.
반 작가가 올해 5~6월 최가영 작가와 함께 중국 다롄, 단둥, 선양, 창춘, 옌변, 투먼 등 북·중 접경 지역을 직접 돌며 조사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완성했다. 과거 만주라는 국가가 존재했을 당시 남만주 주식회사가 만든 철도 루트를 따라갔다.
같은 길을 걸으면서 반 작가는 과거의 분단이 현재 유통 구조에 끼치는 영향에 집중했고, 최 작가는 일제강점기 때 사치품이자 조선인 노동 착취의 산물인 '통조림'을 매개로 과거의 흔적을 쫓았다.
반 작가는 북·중 접경지역에서 아쉽게도 원활하지 않았던 교역 상황으로 북한 물건의 판매 현장을 보진 못했지만, 오히려 해외 컬렉터나 유통망을 통해 남한에서 '북한 물품'을 손쉽게 구매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아이디어를 다시 얻었다고 한다.
그는 전시장에 굿즈 주문 시스템을 모티프로 한 인터랙티브 설치를 선보였다. 주문이 끝나면 북한 물건이 이동하는 여정도 시뮬레이션한다.
실제로 해외에서 들여온 북한 생활용품, 각국의 도장이 찍힌 택배 상자들도 전시장에 놓여 있다. 관객은 마치 온라인 주문 시스템을 따라가듯 물건이 거쳐 온 경로와 소요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효율성입니다. 근데 북한에서 남한은 직선 거리로는 너무나도 가깝지만, 북한의 물건이 남한으로 오기 위해서는 직선으로 오지 못하고 중국, 미국, 혹은 일본 등 다양한 루트로 돌아서 남한에 도착하죠. 분단으로 인해 보편화된 유통 시스템이 왜곡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실제로 전시에서 선택된 주문 제품들은 10월 말로 기획된 공연에 등장할 예정이다. 실제로 북한 물품 분석가를 초청해 북한 제품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 '진품명품 쇼'와 비슷한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 북한과 관련된 각자의 기억과 이미지들을 소환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예정이다.
반 작가의 전시는 새벽 배송이 일상이 된 시대에 서울에서 멀지 않은 어떤 지역과 관련돼 보이는 물건이 이곳에 오기까지 거듭되는 '비가시적 거래'와 환적·지연·경로 변경을 전시로 풀어냈다. 또 이를 통해 '분단'이라는 상황이 한반도의 유통 경로를 굴절·왜곡시키고 있다는 점을 짚었다.
반 작가는 "통일이 된다면 더는 이런 작업을 하지 않을 것 같다"며 웃음을 지었다. 이어 그는 “저는 우리가 분단돼 있기 때문에만 느낄 수 있는 지점들에 관심이 생긴다"며 "북한 물품이 문 앞에 도착하는 그 순간, 분단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일상의 무게로 다가온다고 생각한다"라고 설명했다.
반재하 작가는 '보편적인 논리'가 오작동하는 순간들을 포착해 왔다고 말했다. 분단이란 주제는 그런 순간 중 하나다.
2017년 개인전 '죽은 시간 산 노동'과 2024년 서울대학교 미술관에서 진행된 '예술, 실패한 신화'라는 제목의 전시에서 반재하 작가는 작품 '셔츠와 셔츠'를 선보였다. 그는 현대의 노동 환경과 유통 구조를 들여다보기 위해 유니클로에서 판매하는 옷이 베트남에서 만들어지는 경로를 그대로 쫓아가 직접 똑같은 옷을 만들어가는 작업 과정을 기록했다. 패턴부터 봉제까지 전문가들을 섭외해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며 판매가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도 고민했다.
반 작가가 분단 관련 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탐탁지 않게 보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 북·중 접경 지역을 간다는 소식을 접한 지인들은 북한에 대한 지식 여부를 떠나 다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를 걱정했다.
"어떤 분은 갈 때 버릴 노트북을 가져가라고 하더라고요. 접경 지역에서 잘못 걸리면 작업물을 다 버려야 할 수 있다고 조언도 해줬어요."
그는 북한과 연결고리가 없던 삶을 살아왔던 것이 오히려 지금의 분단 현실을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관객과 지인들에게 작품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 정도 누구나 조금씩은 북한에 대한 기억이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게, 분단 관련 작업한 걸로 소통하다 보면 거의 모든 분이 삶 속에서 북한을 만난 기억들이 다 있는 거예요.가족 중에 '누가 북한이 고향이다'부터 시작해서 '중국에서 대동강 맥주 먹어봤다' 까지 북한에 대한 본인들만의 '장면들'이 존재해요. 이데올로기가 내재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그냥 잊고 있었던 단면을 분명하게 보여줬다는 것과 가까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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