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비난 못 하고 한국만 때린 북한…정상회담 결과 의식했다

北, 정상회담 내용 빼고 李대통령 연설만 비난…담화 아닌 논평
'김정은 만나고 싶다'는 트럼프 자극 자제하면서 상황 관망

이재명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 로이터=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최소망 기자 = 북한이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개최 이튿날 논평을 발표해 한미 정상의 만남을 겨냥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정상회담 결과나 트럼프 대통령의 말에 대한 평가는 빼고 이 대통령의 '비핵화' 발언에만 발끈하는 반응을 보였다.

조선중앙통신은 27일 '비핵화 망상증에 걸린 위선자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제목의 논평을 통해 이 대통령이 지난 25일(현지시간) 워싱턴 D.C.의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 한 연설에서 비핵화를 언급한 것을 "아직도 헛된 기대를 점쳐보는 너무도 허망한 망상"이라고 비난했다.

이 대통령은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비핵화를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며 "한반도에서 핵확산금지조약(NPT) 상 의무는 철저히 준수돼야 하고, 그것이 남북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도 분명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은 이 대통령의 연설 중 특히 비핵화를 언급한 것에 날을 세웠다. 북한은 "우리의 핵보유국 지위는 외부로부터의 적대적 위협과 세계 안보 역학 구도의 변천을 정확히 반영한 필연적 선택"이라며 "우리의 핵 정책이 바뀌자면 세상이 변해야 하고 조선반도(한반도)의 정치 군사적 환경이 변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북한은 이날 이 대통령의 실명을 직접 언급하며 "위선자", "놀아댄 추태", "비핵화 망상증의 유전병" 등 거친 발언을 했지만, 고위 당국자나 대남 및 대외 사안을 다루는 공식 기구 명의의 담화가 아닌 관영매체의 논평으로 입장을 발표했다. 북한이 메시지의 톤 조절을 위해 발표 명의를 조절한 것으로 보인다.

한미 정상회담 자체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 관련 의제가 비중 있게 다뤄지고, 트럼프 대통령이 예상보다 큰 관심을 보였다는 것을 의식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월 말 경주에서 개막하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를 만나는 것이 어떠냐는 이 대통령의 제안에 호응하며 "연내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를 만나고 싶다"라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이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이 '피스메이커'가 되면 자신이 '페이스메이커'가 되겠다며 평양에 '트럼프 월드'를 건설해 이 대통령이 골프를 칠 수 있게 해달라고 제안한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북한의 입장에선 당장 북미, 남북 대화를 상정하고 있지 않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관련 사안에 큰 관심을 보인 점을 간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상 갑작스럽게 대북 접촉 시도 등 '드라이브'를 걸면 이를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도 지난달 말 담화에서 김 총비서와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분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논평은 한미 정상회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경우 오히려 북한이 물밑 접촉 등 대화를 준비하는 것이란 해석이 나올 것을 경계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대신 급과 격이 낮은 주체를 앞세워 한국을 겨냥하며 남북관계에서의 주도권 싸움을 지속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김 총비서가 한미 정상회담이 진행된 날 평양을 떠나 지방을 찾고 '민생'을 챙기는 행보를 보인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의도적 행보로 보인다.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김 총비서가 190여 일 만에 완공된 낙원군 바닷가 양식사업소를 방문하고 '지방발전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서 그의 현지지도 날짜를 26일로 명시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은 "트럼프의 '러브콜'에 북한이 즉각 반응하지 않은 것은 내부적으로 정상회담 내용을 검토하고 대응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인다"며 "대외적으로는 미국이 말뿐이 아닌 대북 적대시 정책 폐기 조치를 내놓는지 지켜보겠다는 신호"라고 해석했다.

북한은 지난해 5월 한중일 정상회의 직후 '한반도 비핵화' 표현이 공동선언에 담기자, 약 두 시간 만에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엄중한 정치적 도발"이라고 반발한 바 있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는 '비핵화'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아 북한이 반응을 아끼는 것일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somangchoi@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