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남북 대화 의지가 있나? [정창현의 북한읽기]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 김여정은 현재 북한 '최고 정책지도기관'인 국무위원회의 국무위원으로 대남, 대미 외교를 총괄하고 있다. 그는 2018년 2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서울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남북관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북미 정상회담이 추진되면서 대미관계에도 관여하기 시작했다.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후 '근신 처분'을 받고 당 제1부부장에서 부부장으로 강등되었지만 2020년부터는 개인 명의로 한국과 미국을 향한 메시지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1년 10월 국무위원으로 임명되어 공식적으로 대남, 대미 분야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22차례나 담화문을 냈다.
그런 김여정 국무위원이 지난달 28일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55일 만에 첫 공개·공식 반응을 내놓았다. 김 국무위원이 대남 담화를 낸 것은 지난해 11월 대북전단 관련 비난 담화 이후 약 8개월 만이다. 그리고 8·15경축사를 하루 앞둔 14일에 두 번째 대남 담화문을 냈다.
'조한(남북) 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제목의 첫 번째 담화문에는 김 국무위원은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으며,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 '서울의 희망은 어리석은 꿈에 불과하다'는 제목의 두 번째 담화문에서는 이재명 정부의 긴장 완화 조치를 '기만극'이라고 평가절하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에 관심이 없음을 거듭 확인했다.
그는 왜 이 시점에 연속적으로 대화 가능성을 부인하는 담화문을 내놓았을까? 그의 대남메시지는 직설적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모호하고 이중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 오랜 기간 북핵 협상에 참여했던 성 김 전 주한미국대사는 지난해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핵을 포함해 모든 협상에서 중요한 건 공감하는(empathetic) 능력"이라며 "상대가 왜 저렇게 나오는지 이해하고 그 맥락(context)을 알아야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가 강조한 것처럼 남북관계의 복원을 위해서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김여정 국무위원이 침묵을 깨고 연속적으로 담화문을 낸 맥락을 우선 파악해야 한다.
김 국무위원이 연속적으로 담화문을 낸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여러 경로로 전달된 '남북대화 복원' 의사에 대해 북한의 공식 입장을 표명해야 할 필요성이다. 정부차원이든, 민간차원이든 다양한 통로로 한국 정부의 대화 의지가 전달됐고, 이러한 메시지를 받은 북한의 외무성도 입장 정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북한은 2023년 12월 노동당 전원회의 이후 당 통일전선부를 당 중앙위원회 '10국'으로 축소했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나 민족화해협의회 등 기존 남북대화와 교류 창구 역할을 하던 기구들을 모두 폐지해 업무를 외무성으로 이관한 바 있다.
둘째는 이재명 정부가 "신뢰 회복에 필요한 행동"이라며 내놓은 일련의 조치에 대해 선 긋기를 할 필요성이다. 2023년 12월 '적대적인 두 국가론'을 선언한 후 북한은 한국에 대해 기본적으로 '무시 정책'으로 일관했다. 지난해 대북전단 살포에 오물풍선으로 대응했던 북한은 이재명 정부가 선제적으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자 이에 호응해 대남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정책 기조가 바뀐 것이 아니라 '강 대 강', '선 대 선' 원칙에 따라 한국의 행동에 대해 상응하는 조치를 한다는 내부 방침에 따른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재명 정부가 이를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해석하자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 삐라 살포 중지, 개별적 한국인들의 북한 관광 허용 등의 비본질적인 조치로는 대화여지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부 당국자 사이에서 10월 경주시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초청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발언이 나온 것도 김 국무위원이 직접 담화문을 내는 하나의 계기가 됐을 것이다.
특히 8월 14일 자 담화는 북한의 대남확성기 철거를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군부의 입장을 반영하고, 7월 28일의 첫 번째 담화에 대해 이재명 정부가 오판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지적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 국무위원은 "한국이 확성기를 철거하든, 방송을 중단하든, (한미)훈련을 연기하든 축소하든 우리는 개의치 않으며 관심이 없다"라며 이러한 조치들은 비핵화를 주장하거나 한미합동군사연습을 실시하는 조건에서 '기만극'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두 번째 담화문을 낸 지 5일 후인 8월 19일 김여정 국무위원은 외무성 국장협의회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 정부의 기만적인 '유화 공세'의 본질과 이중적 성격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국가수반의 대외정책 구상을 전달포치하였다"라고 한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과 통일부·외교부·국방부 장관의 최근 발언을 조목조목 인용 분석하며 "그 구상에 대하여 평한다면 마디마디, 조항조항이 망상이고 개꿈"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평화 시늉과 관계 개선에 대한 장황한 횡설수설을 계속하고 있는 데는 궁극적으로 조한관계가 되돌려지지 않는 책임을 우리에게 넘겨씌우자는 고약한 속심이 깔려있다"라고 분석했다.
직설적인 비난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 협의회에서 언급된 '대외정책 구상'의 핵심은 한반도 평화 환경 조성을 위한 이재명 정부의 외교 활동에 대해 대응조치를 마련하라는 것이다.
김 국무위원의 담화문과 외무성 국장협의회에서의 발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보면 당장 남북관계 개선이나 당국 간 대화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한이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통일과 영토 규정을 담은 헌법 개정, 핵보유국 지위 인정, 한미합동군사연습 폐지 등은 한국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다.
북한도 이재명 정부가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같이 원론적 입장을 내놓은 것은 이재명 정부 등장 이후 달라진 상황을 고려해 내부적으로 대남 기조를 재확인하고, 남북 대화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 국무위원은 "그들도(한국 정부 당국자) 저들이 바라는 조한관계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모른다면 천치일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역설적으로 이 표현은 북한의 속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남쪽의 당국과 전문가들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다.
2년 전인 2023년 7월 17일 그가 낸 담화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담화문에서 그는 "아무리 전 대통령이 서명하고 공약한 것이라고 해도 새로운 정부가 들어앉으면 그것을 제 손바닥처럼 뒤집는 것이 바로 미합중국과 '대한민국'이다"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윤석열이나 바이든과 같은 그 어떤 개인을 대상으로 하여 전략을 구사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을 상대로 장기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핵심은 '보수정권'이냐 '진보정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합의 이행과 정책의 연속성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김 국무위원의 담화문에 담긴 북한의 속내는 무엇일까?
첫째는 판문점선언을 비롯해 문재인 정부 때 합의, 서명한 사안들은 정권 차원이 아닌 대한민국과 합의한 것이므로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일방적으로 폐기된 것에 대해 현 정부 차원의 유감 표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속가능한 남북관계를 위해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치를 선제적으로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9·19군사합의를 선제적 단계적으로 복원"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5·24조치 폐기, 판문점선언과 9·19군사합의의 국회 비준 등 신뢰를 줄 수 있는 조치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다른 나라나 북한과 인연이 있는 개인, 민간단체를 활용해 우회하지 말고 정공법으로 책임 있는 당국자가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지난 19일 외무성 국장협의회에서는 외무성이 "(한국 정부의) 선동에 귀를 기울이는 국가들과의 관계에 대한 적중한 대응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중국과 러시아 등을 상대로 하는 한국 정부의 외교적 노력, 정상회담을 중재하겠다고 나선 두 나라의 제안 등을 고려한 대응으로 보인다.
세 가지 사항 모두 그대로 수용하거나 단기간에 구체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새롭게 남북관계를 재정립하고, 꽉 막힌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나가는데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지난 80년간 '지속가능하고, 안정적 남북관계'를 구축하지 못한 것을 어느 일방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격변하는 국제 정세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평화와 공동 번영'을 모색하는 남북관계의 재정립이 필수적이다. 내부적으로 남북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넓히고 "보수의 간판을 달든, 민주의 감투를 쓰든 공화국(북)에 대한 한국의 대결 야망은 추호도 변함이 없이 대물림해 왔다"라는 북한의 인식을 바꿀 수 있는 현실적인 정책대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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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북한 정치·군사·사회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함께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등 북한 수뇌부에 대한 '리더십 해석'을 통해 반 발짝 앞서 북한의 변화를 읽어낸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서울대 대학원(국사학과)을 마치고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전문기자를 거쳐 국민대·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국가기록원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