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고소 사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시선[한반도 GPS]
- 유민주 기자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 북한 정부에 책임을 묻기 위한 재판이 진행될 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실익'입니다. 금전적 보상은 물론이고 명예 회복, 권리 확보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위해 누군가는 기꺼이 지난한 과정을 감수합니다.
지난 11일 탈북민 출신 최민경 씨는 북한 최고지도자인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와 당국자들의 인권 침해 행위에 대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민사소장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형사 고소장을 각각 제출했습니다.
최 씨는 1997년 첫 탈북 후 중국에서 체류하다 2008년 강제 북송됐는데, 북한의 구금시설에서 약 5개월간 성적 가학 행위와 물리적 폭력, 비인도적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고발하기 위해 탈북민으로는 처음으로 김 총비서와 보위부(현 국가보위성) 소속 관계자 5명에게 국제형사범죄법 위반 등 혐의를 적용해 형사 책임을 묻겠다는 방침입니다.
최 씨를 대리해 소송을 진행한 북한인권정보센터(NKDB) 인권침해지원센터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도 '승소를 해도 처벌받을 확률이 낮은데 그럼에도 소송을 제기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이 반복됐습니다. 판례가 남아도 현실적인 처벌 혹은 배상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데 재판이 무슨 소용이냐는 것입니다.
이번 사건은 북한에서 나고 자란 인권 침해 피해자가 북한 최고지도자를 대한민국 검찰에 최초로 고소한 사례지만 과거 북한 정권을 상대로 대한민국에서 민사소송을 제기한 사례는 계속 있었습니다. 납북자나 국군포로 유족 등 피해자가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들입니다.
주요 사건 당사자들과 1심 판결 날짜로는 △한국전쟁 국군포로 2명(2020년 7월) △6·25 전쟁 당시 납북된 피해자의 가족(2021년 3월) △납북자 유족 12명(2022년 5월)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고(故) 한상국 상사의 유족과 부상자들(2022년 8월) △김성태 씨 등 3명의 탈북한 국군포로(2023년 5월) △체제 선전에 속아 북한에 갔다가 탈출한 재일교포 출신 탈북민 5인(2024년 9월) 등입니다.
그동안 북한을 피고로 진행된 민사소송은 대부분 원고 승소 판결이 확정됐습니다. 대법원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것이, 북한이 1심 패소 판결에 항소하지 않(못)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법원이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다고 해도 실제로 배상을 받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따라서 피해자들은 북한에 지급할 자금을 관리하는 단체를 상대로 추가 법적 조치에 나서는 등의 부차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늘 과제였습니다.
실제로 북한 관영매체의 저작권료를 위탁·보관하는 사단법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에 공탁되어 있는 돈 약 22억 원에 대한 추심 소송을 진행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저작권료는 북한 당국이 아닌 저작권자의 것"이라는 경문협의 의견을 받아들여 이 돈이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으로 쓰이진 못했습니다.
소송의 결과와 실익도 중요하지만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소송들에서 드러나는 사법부의 '시선'인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법원은 헌법 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를 근거로 북한을 사실상 지방정부와 유사한 정치적 단체가 지배하는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채 심리를 진행했습니다.
민사소송에서 소송당사자는 당사자 능력을 가져야 하고, 당사자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주로 개인이나 법인입니다. 법인이 아닌 사단이나 재단의 경우 비법인사단으로 당사자 능력을 부여할 수 있는데, 북한을 남북관계발전법 등에 근거해 비법인사단으로 볼 경우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외국 국가에 대해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국제법 원칙(국가면제)이 있는데, 대한민국 법원은 북한을 '국가가 아니라 단체'로 보고 국가면제 적용을 배제했기에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에는 북한을 '불법 행위의 주체'로 본다는 사법 판단도 포함됩니다.
특히 지난 2023년 선고된 국군포로 3인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법원은 북한 정권이 이들에 대해 장기간 강제노역을 부과하고 인권 침해를 가한 점, 그리고 이러한 정책이 김정은의 지휘 아래 지속되었다는 점을 들어 김정은 개인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이 판결은 대한민국 사법 역사에서 의미가 있는 판결로 평가됩니다.
북한이 단지 '통일의 대상'이라기 보다 개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불법행위 책임 당사자로 볼 수 있다는 법적 판단이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법원의 시각이 남북관계를 '피해자 중심'으로 접근하게 만든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남북관계에 '법치'가 개입되는 것이 향후 교류와 협력이라는 과제에 방해가 된다는 시선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판결은 단지 규칙의 체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과 사회적 시선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응한 북한 관련 피해 구제를 사법부가 먼저 이끌어간 사례들이라는 점에서 법원의 결정은 정치, 외교의 결과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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