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남북청년 독서모임' 이끈 탈북 청년이 마주한 질문[155마일]

정서윤 탈북 작가 인터뷰·…"책을 매개로 '진솔한 생각' 공유"
"탈북민은 불우 이웃 아닌 '남과 북을 이을 수 있는 사람들'"

편집자주 ...155마일은 남북 사이에 놓인 군사분계선의 길이입니다. 이 경계의 실체는 선명하지만, 경계에 가려진 사실은 투명하지 않습니다. 분단의 현실을 직시하되, 경계 너머 북한을 제대로 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겠습니다.

정서윤 탈북 작가.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이상한 책' 읽는 건 아니지?"

대한민국에서 남북 청년들이 함께 독서 모임을 한다고 했을 때 한 번쯤 들어볼 법한 질문이다. 장난 섞인 가벼운 물음일지라도 여기에 숨은 의구심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할 남한 사람은 없다. 더욱이 11년째 이 모임을 이끌어 온 탈북민 정서윤(36) 씨의 일상에 늘 등장하는 익숙한 질문이기도 하다.

지난 18일 뉴스1과 만난 서윤 씨는 2015년 독서 모임 '남북(book)한걸음'에서 출발해 현재는 남북 청년 간 소통을 돕는 비영리 민간단체 '유니피벗'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 정착한 지 어느덧 23년 차가 되었지만 본인의 생각을 말하는 일은 여전히 조심스럽다고 한다. 남북 청년들이 모이는 것 자체만으로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경험이 누적되면서다.

세상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탈북민을 '우리 국민'으로 보지 못하는 장벽을 허물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많다고 느낀 서윤 씨는 '상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선입견과 공포가 공존을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했고, 그 무지를 깨기 위해 남북 청년들의 생각을 독서 모임을 통해 공유할 수 있게 했다.

서윤 씨는 "책을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직접 묻기 어려운 개인적인 경험도 자연스럽게 나오곤 한다"라며 "경계 없이 무궁무진한 주제를 말할 수 있어서 좋다"라고 '책'을 소통의 매개로 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진솔한 대화의 장 만드는 수평적 '테이블 세팅'

서윤 씨는 어린 시절에도 책을 좋아하고 글 쓰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아직도 북한에서의 많은 추억들이 선명하지만, 북한에 대한 정보는 자신이 탈북한 1998년에 멈춰 있기도 하다.

10살이었던 서윤 씨와 그의 가족 10명은 시기를 나눠 순차적으로 탈북했다. 다양한 사연이 가득한 탈북민 커뮤니티에서도 서윤 씨의 사례처럼 대가족이 탈북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먼 친척이 중국에 살고 있어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서윤 씨 외증조부의 고향이 남한의 대구였고, 외증조모는 전주 출신이었다는 점도 한몫했다고 한다.

1990년대 중반은 국가에서 제공하는 배급마저 끊기던 '고난의 행군' 시기였기에, 형편이 넉넉지 않던 서윤 씨의 부모님은 아이 둘을 각각 한 명씩 데리고 친가와 외가댁에서 생활했다. 서윤 씨도 외가로 보내져 생활하다가 두만강을 건너게 됐는데, 북한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가 북한에 남았다. 아버지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후 4년간 중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다가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일 때 한국 땅을 밟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인생 2막은 '의심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점철된 여정이었다. 검정고시를 통과해 이화여자대학교 사범대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고, 탈북 청소년들을 돕고자 북한학 석사도 이수하고, 사기업에서도 잠깐 사회생활을 했다. 이 과정에서 서윤 씨는 수많은 '편견'과 부딪혀야 했다.

평범한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는 사실 주목을 받지 못한다. 고위 간부의 영화 같은 탈북 이야기, 생사를 오가는 박진감 넘치는 탈북 과정 등이 미디어를 통해 주목을 받지만, 사실 이는 수많은 탈북 사례와 탈북민의 인생사 중 지극히 일부다.

그래서 서윤 씨가 주최하는 모든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평적이고 균형 있는 대화'다. 책 선정은 물론이고 어떤 활동이든 남북 청년의 인원수를 똑같이 맞춘다. 조금이라도 심리적으로 위축될 만한 요소를 줄이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나름의 '테이블 세팅'이다.

대학 시절부터 수없이 접했던 남북 이해 증진을 위한 토크콘서트나 강연회가 이런 아이디어에 도움이 됐다. 소수의 경험담이 모든 탈북민의 경험처럼 여겨지는 것이, 결코 서로의 이해를 위한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편적인 경험 공유가 아니라 서로의 진짜 생각을 듣고 존중해 줄 수 있는 지속적인 소통의 장을 만들고 싶었다는 게 서윤 씨의 이야기다.

"북한 친구들은 남한을 관찰하기만 해요. 남한 사람들을 모방하는 데 그치는 것인데, 그 때문에 서로의 장벽을 넘나들지 못한다고 해야 될까요? 북한에서 왔다는 걸 숨기기 때문에 오히려 남한 친구들과 가까워지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온 과거를 숨겨야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겠어요?"

지난 10년간 남북 청년들이 같이 읽은 책이 어느덧 130권을 넘겼다. 지난해 통일부 산하 비영리 민간단체인 '유니피벗'을 출범한 이후로는 독서 모임뿐만 아니라 취업에 도움이 되는 강연부터 민주시민성을 주제로 한 강연, 남북 청년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금융 이해 및 자본 형성에 대한 교육도 진행했다. 스포츠와 문화 체험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온오프라인으로 진행되는 독서 모임 소개 패이지. 유니피벗 홈페이지 갈무리.
탈북 경험 많이 알려진다고 '통일'에 가까워지지 않는다

서윤 씨의 첫 책인 '어떤 불시착'의 큰글자도서 버전은 지난 4월 발간됐다. 북한과 중국에서의 경험이 아닌 한국에서의 생활을 중점으로 담았다. 남북한을 비교하는 콘텐츠는 많지만, 정작 한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북한이탈주민들의 적나라한 적응기는 많이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북한이탈주민들이 겪는 어려움과 그 과정에서 탈북민들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자리 잡게 되는지 알려 주는 콘텐츠는 생각보다 찾기 어렵습니다.탈북민들이 경험을 숨기고 남한의 빛나는 점들만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이'통일'을 꿈꾸게 되지는 않잖아요. 저는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책으로 펴낸 서윤 씨의 남한 사회 정착기는 결코 '편하지' 않다.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이야기만 담았는데도, 이를 위해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 불만이 많은 탈북민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서윤 씨는 탈북민들을 '도와야 하는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순간 수평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통일의 범위는 남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이기에, 같은 국민으로서 받을 수 있는 권리는 물론 사회적 인식과 시선 또한 똑같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탈북민 관련 예산 투입이 복지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통일을 위한 투자'라는 프레임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게 서윤 씨의 주장이다.

"탈북민은 이 사회에 기여하지 않고도 뭔가를 누리는 존재라는 시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북민들이 누리는 복지는 공짜가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이자 분단 체제를 극복할 때 분명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력 자원'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서윤 씨는 대부분 중국에서 온 제3국 출생 탈북민 자녀들이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에 왔다가도 다시 돌아가는 경향이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봤다.

이중적인 정체성을 버릴 것을 강요받고, 한국 정착에만 초점을 맞춘 교육은, 장기적으로 보면 한 아이의 뿌리를 모두 부인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우리 사회가 신뢰하는 '100% 한국인'이 되기 위해 철저히 자신의 이야기를 숨기려 노력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탈북민이 '100% 한국인'이 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은 아니다

10년 전 정한 '남북한걸음'이라는 모임의 이름이 '유니피벗'이라는, 단박에 이해되진 않는 이름으로 바뀐 과정은 서윤 씨에게는 교훈적 경험이 됐다. '남북한걸음'이라는 이름의 카카오 채널을 만들어 활동 소식을 받아 볼 수 있도록 했는데, 아이를 키우던 어떤 회원이 채널을 추가했다가 지웠다는 것이었다.

어린 자녀를 둔 탈북민 엄마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자신의 자녀도 북한에서 온 것을 모른 채 남한 아이들과 똑같이 대우받으며 살아가길 원하는데, '남북한걸음' 채널 알림이 뜰 때마다 누군가 그의 가족의 출신을 알게될까봐 조바심이 났다는 것이다.

서윤 씨는 '연합하다'라는 뜻의 'Unite'와 급변하는 외부 환경에 따라 사업의 방향을 전환한다는 뜻의 'Pivoting'을 합쳐 '유니피벗'이라는 이름을 새로 지었다. 남북 청년들이 연합해 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자는 의미도 담았다.

어떤 사람들은 서윤 씨가 10년간 북한에 살고, 20여 년을 한국에 살았으니 '한국인 다 됐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이 결코 칭찬으로만 들리진 않는다고 한다.

서윤 씨가 말하는 우리 사회는 '북한'이라는 정체성을 완전히 지워야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내놓고 살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서윤 씨는 누구나 당당히 북한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는 사회를 꿈꾸고 있다.

"그저 수적으로 많은 탈북민이 한국으로 온다고 해서 통일이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북한이 아닌 우리를 선택하라'는 말은 결국 탈북민을 체제 경쟁의 산물로만 본다는 방증이죠.북한이 싫어서 나온 사람, 사회주의가 싫고 민주주의를 찾아온 사람이 아니라 그냥 '북한에도 가족이 있고, 남한을 또 새로운 터전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남과 북을 다시 이을 수 있는 사람들'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youmj@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