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알길 없는 北 가족들이 여전한 삶의 원동력" [155마일]
탈북 예술가 '코이'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법
- 유민주 기자
(서울=뉴스1) 유민주 기자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저는 한국으로 왔을 것 같아요."
이 한마디에 확신이 생기기까지 1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혈혈단신 만 18세에 탈북한 예술가 '코이'(활동명)가 가족의 생사도 파악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기까지, 그럼에도 가족을 위해 버틴 순간들 덕분에 현재의 삶을 살게 됐다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기까지 걸린 세월이다.
2012년 홍익대학교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에 입학해 지금은 어엿한 한 회사의 직장인으로, 주말엔 전시를 준비하는 예술가로 과분할 만큼 안정적인 삶을 얻었지만, 이렇게 살기까지 그는 "큰 값(대가)을 치른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코이가 말한 '평범한 삶'에 대한 대가가 무엇인지는 올해 6월 28일까지 진행하는 설치예술 전시인 '19+16'에서 어렴풋이 드러난다. 고향에 두고 온 지인 50명에게 안부를 전하는 메시지, 중국을 떠난 순간부터 국정원에 도착하는 시점까지 부모님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신발 밑창에 꾹꾹 눌러 담았다. 북한에서 일반 주민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신는다는 '편리화'와 최대한 비슷한 신발을 중국에서 공수해 왔다.
그는 어느 정도 삶의 안정감을 느끼는 지금이 오히려 '모호한 정체성의 경계선'에 서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정체성이 형성되는 청소년 시기를 북한에서 보내며 당연히 자신의 '뿌리'는 그곳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북한에서 보낸 만큼의 세월을 한국에서 살면서 스스로 너무 많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가끔은 북한을 완전히 잊고 살아가는 날도 생겼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고민을 풀어내고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 기획됐다. 그는 "희미해지는 감정들, 북한에서의 추억이 단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에게 큰 위로가 되고 있음을 작품을 하면서 깊게 깨닫게 됐다"며 "나의 사연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이 새터민(탈북민)의 삶과 남북 통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할머니집 놀러 간다는 마음으로 가."
한밤중에 집을 떠나야 했던 막내딸에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코이는 가족과 헤어지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모든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두만강을 건너는 딸에게 '동네 개울을 건넌다'는 생각으로 가라고 누누이 다독였다.
일찍이 생각이 깨인 부모님은 야무진 딸이 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전폭 지원했다고 한다. 15살 때는 부모님의 권유로 '배움의 천리길'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한 달 내내 천리를 걸으며 북한 체제를 배우는 전국 투어 일정이었다.
코이는 천리를 걸으며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느꼈다"며 부모님도 일찍이 딸의 포부를 알아보고 전 세계를 누빌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런 코이에게 탈북은 기회만 오면 반드시 이뤄질 일이었다. 실제로 기회가 왔던 날 밤에도 떠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별나게 총명했던 딸에 대한 부모의 믿음과 기대가 만들어낸 '기적'이기도 했다. 그는 "결정의 시간이 길어졌다면 못 갔을 것 같다"며 "아버지가 해준 말만 되새기면서 무작정 강을 건넜고, 중국에 도착하니까 비로소 (탈북한 것이)실감이 났다"라고 회상했다.
코이가 떠나고 1, 2년 후 가족들도 뒤따를 계획이었다. 한국에서 만나자는 약속도 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탈북을 시도하다 북송된 가족과 몇 년 후에나 알게 된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듣고는 삶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죄책감에 파묻혀 자책을 반복했다.
"그때 처음으로 한국에 온 것을 후회했어요.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았거든요. 통일이 됐을 때 가족들에게 내가 정말 건강하게 잘살고 있었다고 보여주는 게 삶의 희망이고 목적이었는데 그게 사라졌어요."
주변에서는 건강을 위해 휴학도 권유했다. 하지만 감정에 더 매몰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취 생활을 정리하고 기숙사로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선택을 한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고 한다.
"살아 있으니 또 살아가려고 환경을 바꾸는 제 모습이 마치 '동물' 같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그렇게라도 살아있으니 살아가야 하는 그때가 제 인생의 엄청난 터닝 포인트가 됐어요. '하늘에서도 응원해줄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돼야겠다' 그리고 '가족들 몫까지 더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됐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코이가 계속해서 성장하기 위해 도전하며 후회하지 않는 하루를 살아가는 원동력은 여전히 가족이다. '내일의 나는 없을 수 있다'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온 이유이자 현재 평범한 삶과 맞바꾼 경험이 되었다.
'코이'는 '비단잉어' 혹은 잉어를 뜻하는 일본말이다.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밖에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연못에서 살면 15~25㎝, 강물에서 90~120㎝까지도 큰다고 한다. 환경에 맞게 성장할 수 있는 삶을 산다는 것. 그가 비단잉어와 자신을 동일시한 이유다.
이름에 걸맞게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며 무언가에 구애받지 않는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것이 코이의 바람이다. 본업을 그만두지 않고 따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이유도 자본의 영향으로 방향성을 잃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그는 이 대목에서 꽤 단호했다.
"경제적인 것이 우선이 되는 작품 활동을 하고 싶진 않아요. 제 목소리와 방향성에 맞는 곳에 전시하고 싶었어요. 정말 의미 있는 곳이라면 사비를 들여서라도 참여하고 있고 그게 지금 저의 활동 신념이에요."
그가 한 달 넘게 공을 들인 작품인 '유닛 하모니'(Unit Harmony)는 소원을 적어 날리면 이뤄지는 종이비행기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나의 유닛은 각기 다른 개인의 꿈을 상징하는데, 이 모든 꿈들이 하나로 합쳐져 더 큰 꿈을 이루듯이 남북 통합을 바라는 염원이 모이면 더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코이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남과 북'이 서로의 마음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남북한의 문제를 바라보는 이웃 국가들에도 통일에 대한 소망을 함께 꿈꿀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작품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아주 정교한 작품이어서 품이 많이 드는데 그만큼 우리 한 명 한 명, 그러니까 북한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통일과 남북 통합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통일을 더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저의 마음을 담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북한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될 때마다 작품에 녹여낼 계획이지만, 그는 담담하게 탈북민이란 '출신'이 작품성을 앞서지 않도록 평가받는 것이 남겨진 숙제라고 말했다.
코이는 자신이 북한에서 온 작가라서 분명히 더 주목받는 점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 틀에 갇히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 작품의 제목 '19+16'에는 16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이 19년간의 북한 생활과 무관하지 않고, 그 연장선에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
작품 활동 초기부터 지금까지는 북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또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작가 코이'의 작품 세계가 드러날 수 있도록, 또 한 번의 성장을 위해 헤엄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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