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원 지하철이 400원…3년째 성장한 北, 주민 삶은 왜 팍팍해졌나
성장률 3.5%인데 쌀·달러값은 두 배…엇갈린 北 체감경기
원화 생활자에 더 큰 물가 충격…지하철도 '제값 받기'로
- 한상희 기자
(서울=뉴스1) 한상희 기자 = 북한 평양 지하철 매표 창구에 5000원을 내밀었더니 승차권은 예전의 30여 장 대신 13장 남짓만 돌아왔다. 표에 찍힌 가격은 '료금 400원'.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는 한 중국인 유학생이 최근 중국 소셜미디어 '샤오홍슈'에 올린 경험담이다.
19일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따르면 2024년 11월 러시아인 여행객이 촬영한 영상에서 확인된 요금은 150원이었다. 2년이 채 안 돼 2.7배로 오른 셈이다. 2019년 AP통신이 평양 현지에서 확인한 5원과 비교하면 명목상 80배다.
샤오홍슈에서 '은정박사(恩情博士)' 계정을 쓰는 이 유학생은 "인플레이션이 몇 배나 된 것 같지만 환율로 환산하면 매우 싸서 돈을 내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적었다. 실제 400원은 올해 5월 장마당 환율 기준 약 0.6센트(한화 약 8원)에 불과하다.
외국인에게는 여전히 '거의 공짜'에 가깝지만, 가파른 요금 인상에는 원화 가치 하락뿐 아니라 공공서비스에도 '제값'을 매기려는 북한 당국의 정책 변화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은행은 북한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2025년 3.5% 증가한 것으로 추정했다. 2023년 3.1%, 2024년 3.7%에 이어 3년 연속 성장이다. 제조업과 건설업이 성장을 이끌었고, 우크라이나 전쟁 참전에 따른 대러 협력 확대가 경제 회복의 배경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장마당의 체감은 달랐다. 임송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미국의 북한 전문매체 38노스 기고문에서 2025년 북한의 시장물가와 시장환율이 각각 전년 대비 63.1%, 119.9% 상승한 것으로 분석했다. 한국은행 공식 물가 통계가 아니라 북한 내부 시장지표를 토대로 한 별도 분석치다.
올해도 원화 가치 하락은 이어졌다. 38노스가 일본 매체 아시아프레스의 북한 내부 시장가격 조사를 분석한 결과 장마당 달러값은 1월 평균 1달러당 약 3만 7250원에서 5월 7만 800원으로 두 배 가까이 올랐다. 같은 기간 쌀과 옥수수, 휘발유와 경유 값도 대체로 두 배로 뛰었다.
GDP가 나라 전체의 생산 규모를 보여준다면 환율과 물가는 주민 손에 든 원화로 무엇을 살 수 있는지를 좌우한다. 공장과 건설 현장이 바빠져도 가계의 구매력이 함께 좋아진다고 단정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북한 주민 모두가 이전보다 가난해졌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임수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은 지난 4월 전략보고서에서 현재까지는 임금 인상이 물가 충격을 상당 부분 상쇄해 대규모 식량 위기로 번지지는 않았다고 평가했다.
임 연구위원은 북한 당국이 2023년 말부터 명목임금을 평균 약 20배 올리고 '지방발전 20×10 정책' 같은 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하면서 통화량을 늘린 것을 환율·물가 상승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개인의 외화 사용과 무역을 통제하면서 시장에 풀리는 외화는 줄어든 반면, 국책사업에 필요한 외화 수요는 커진 점도 환율 상승을 부추겼다고 봤다.
다만 월급의 출발점 자체가 워낙 낮았고, 누구에게나 같은 폭의 소득 증가로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북한의 공식 월급은 애초 장마당 물가에 비해 생계를 꾸리기 어려울 만큼 낮았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뉴스1 기고문 '단둥에서 본 북한의 민생경제'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10~20배 인상됐지만 시장가격으로 치면 2~3일분의 쌀을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충격은 소득 형태에 따라 달랐다. 38노스는 외화를 벌거나 보유한 무역업자와 돈 주는 실질 구매력을 대체로 지켰지만, 원화 임금에 의존하는 국영기업 노동자들은 식량과 연료 가격 급등의 충격을 고스란히 떠안았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현물 배급을 받을 수 있는지, 임금이 얼마나 올라갔는지까지 달라 주민들의 체감 경기는 계층과 직장에 따라 엇갈릴 수밖에 없다.
지하철 요금 인상에는 화폐 가치 하락뿐 아니라 국가 운영 방식의 변화도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은이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RFA에 최근 무상 치료와 무상 주택 배정, 국정가격 식량 배급 등 사회주의식 제도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띄게 줄었다며 "이제는 국가가 무상으로 혹은 국정가격으로 인민들에게 주는 게 아니라 제값을 받고 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하철 요금도 같은 흐름에서 다시 올린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이다.
북한 경제는 국가 주도의 생산·건설 확대에 힘입어 성장하고 있지만, 그 온기가 모든 주민에게 고르게 퍼진 것은 아니다. 원화와 외화 중 어떤 소득을 얻는지, 배급을 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체감 경기는 크게 엇갈린다. 외국인에게는 '거의 공짜'인 400원이 북한 주민에게는 국가의 달라진 가격 정책을 드러내는 가격표인 셈이다.
angela020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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