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푸치노·푸아그라까지…장마당 돈 끌어들이는 김정은의 '소비 통치'

국영 쇼핑몰·휴양시설 확충…시장 자금 공식 경제로 흡수
'쓸 곳 없는' 중산층 800만명 겨냥…물가·불만 낮추고 재정 확보

(평양 노동신문=뉴스1)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2월 16일 수도 건설 5개년 계획을 결속 짓는 화성지구 4단계 1만세대 살람집 준공식이 진행됐다고 보도했다.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

(서울=뉴스1) 한상희 기자 = 연어 뱃살회와 푸아그라 햄버거. 북한 대외선전매체 '내나라'가 소개한 평양 화성지구 새 주택단지 내 바비큐 식당의 메뉴다. 같은 단지에는 전자오락실과 자동차 판매점도 들어섰다.

지난해 문을 연 락랑애국금강관에서는 주민들이 카푸치노를 마시며 가전제품을 고르고, 2년 전 문을 연 화성대동강맥주집에선 맥주잔을 기울인다. 최근 소셜미디어에 공개된 영상에 담긴 평양의 풍경이다.

북한이 주민들에게 내놓는 '돈 쓸 곳'이 빠르게 늘고 있다. 화려한 메뉴와 매장 뒤에는 주민들이 장마당에서 모은 돈을 국가가 운영하는 상점과 여가시설로 끌어들이려는 당국의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13일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중국 세관 통계와 북한 매체 기사 1200여 건을 분석하고 최근 북한을 다녀온 방문객 5명과 탈북민 2명을 인터뷰해 달라진 소비 풍경을 전했다.

변화는 수입품 목록에서도 읽힌다. 최근 10년 사이 북한의 마사지 기기 수입은 40배로 뛰었고 러닝머신 수입은 600% 이상 늘었다. 피아노와 손목시계뿐 아니라 회전목마·롤러코스터·워터슬라이드도 들어갔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7월까지 중국에서 들여온 범퍼카만 3톤 이상, 2만 달러(2688만 원)를 넘는다.

소비의 영역은 반려동물로도 넓어졌다. 지난 4월에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가 딸 주애와 함께 화성지구의 새 반려동물상점을 찾아 강아지와 고양이를 둘러봤다.

(평양 노동신문=뉴스1)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딸 주애와 함께 개업을 앞둔 화성지구 4단계 구역의 '화성애완동물상점'을 둘러보며 운영 준비 상황을 살피고 있다.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DB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Redistribution Prohibited] rodongphoto@news1.kr
평양 넘어 원산·삼지연까지…지방으로 넓어지는 소비 공간

소비의 무대는 평양 밖으로도 넓어졌다. 지난해 여름 문을 연 원산갈마해안관광지에는 하반기에만 주민 30만명 이상이 다녀갔다고 주북 중국대사관은 전했다. 중국 접경 삼지연에는 지난해 12월 고급호텔 5곳이 문을 열었고, 인근에는 스키장이 건설되고 있다. 나선에도 사우나와 수영장, 전자오락실 등이 들어섰다. 도서관·영화관·식당 등을 모은 종합봉사소는 전국에서 최소 24곳이 완공됐거나 공사 중이다.

평양에서는 국가 상업망이 장마당 손님까지 겨냥한다. 2023년 문을 연 류경금빛상업중심은 기존 광복지구상업중심보다 약 7배 크고, 북한 최초의 공식 종합시장인 옛 통일거리시장(현 금강시장) 바로 뒤에 자리 잡았다. 오래된 재래시장 곁에 초대형 복합쇼핑몰이 들어선 셈이다.

이제는 국가가 상업시설을 확충해 장마당과 손님을 놓고 경쟁하는 양상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은 로이터에 북한이 민간 시장과 경쟁하고 궁극적으로 그 영향력을 약화할 수 있는 국가 상업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매장의 겉모습뿐 아니라 장사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국영상업망은 생산기업에서 직접 물건을 조달하고, 정해진 국정가격 대신 시장가격에 가까운 '합의가격'으로 판매하는 방식으로 재편되고 있다. 주민에게 물자를 공급하던 상점에 이윤을 남기는 역할까지 맡기는 것이다.

쇼핑몰을 채운 상품도 달라졌다. 소셜미디어 영상에는 류경금빛상업중심 안의 롤렉스·오메가·미쉘 에블랑 등 해외 시계 브랜드 로고와 화웨이 간판이 포착됐다. 강성현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런 소비 정책을 "시장에 집중된 생산과 유통, 자금의 흐름을 국가가 관리하는 공식 경제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로이터에 설명했다.

'돈 쓸 곳 없는' 중산층 800만 명 겨냥…전자결제도 의무화

국가가 겨냥한 소비층은 얼마나 될까. 뤼디거 프랑크 오스트리아 빈대학교 교수는 저축은 있지만 마땅히 쓸 곳이 없는 북한 중산층을 약 800만명으로 추산했다. 전체 인구 약 2600만명의 30%가량이다. 소비처를 늘리면 구매력이 쌀 같은 필수품에 몰려 가격을 밀어 올리는 것을 막고 주민 불만을 누그러뜨리면서 내수 성장도 유도할 수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뉴스1과의 통화에서 북한 경제가 큰 변동 없이 안정 국면에 들어섰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중산층의 소비로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시중의 달러 등 화폐자산을 흡수하려는 당국의 시도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장마당의 돈을 공식경제로 흡수하려는 시도는 휴대전화 화면으로도 이어진다. 북한에서는 '옥류'·'만물상'·'은파산' 등 전자상점을 통해 식료품과 의약품을 사고 음식과 기차표를 주문할 수 있다. 북한은 2023년 모든 은행과 상점이 전자결제를 받도록 법으로 의무화했다.

북한 평양에 있는 화성대동강맥주집. (사진=유튜브 캡쳐)

이런 소비 확대의 배경에는 경제의 회복세가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북한 경제가 3.5% 성장해 3년 연속 3%를 넘는 성장률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했다. 러시아 파병·무기 지원의 대가와 석탄·광물 수출, 암호화폐 탈취 등도 주요 외화 수입원으로 꼽힌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은 북한이 2023년 8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최대 144억 달러(약 19조 3507억 원)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평양 쇼핑몰의 화려한 조명이 북한 전체를 비추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탈북하기 전까지 평양에서 운전기사로 일한 양일철 씨는 평범한 주민은 새 식당과 여가시설을 거의 이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당국을 믿지 못해 전자결제 대신 현금을 고집하는 주민도 여전히 많다고 했다.

소비시설이 평양과 일부 계층을 넘어 지방과 일반 주민에게까지 확산할지, 러시아 특수와 중국 교역에 기댄 성장세가 지속될지도 불확실하다. 프랑크 교수는 김 총비서의 소비 진작 전략이 지금까지는 효과를 내고 있다면서도 "소비는 시간을 벌어준다. 그러나 충성심을 영원히 사주지는 못한다"라고 평가했다.

angela0204@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