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아시아 문화심장터②]조선왕조 발상지와 후백제 도읍지

김승수 전주시장 "전주 전통문화 1300년 넘게 만들어져"
전주 시가지, 전주천 이동 따라 한옥마을 주변에 형성돼

편집자주 ...김승수 전주시장이 ‘아시아 문화심장터’ 프로젝트를 꺼내들었다. 후백제 도읍지이자 조선왕조의 발상지인 원도심 330만㎡(100만평)을 한옥마을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해 전주를 파리와 로마 같은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김 시장은 ‘허황된 꿈’이라는 지적에 ‘가능한 꿈’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에 뉴스1은 전주시가 올해 핵심정책으로 추진 중인 아시아 문화심장터 프로젝트의 배경과 내용을 소개하면서 문제점은 없는지 두루 살펴보는 기획을 준비했다.

전주부사에 실린 전주부 지도. 중앙의 밝은 곳이 전주부성이고 오른 쪽 붉은 선이 후백제 성벽 ⓒ News1 김춘상 기자

(전주=뉴스1) 김춘상 기자 = “전주의 전통문화는 1300년 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똑같은 관광도시를 수 없이 많이 가봤는데, 전주는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전주는 전통문화를 가지고 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김승수 전주시장이 최근 ‘아시아 문화심장터’ 태스크포스(TF)팀 특강에서 “전주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달라”는 취지로 한 말이다.

지난해 옛 전북도청사 부지에서 이뤄진 전라감영 발굴조사에서는 관청을 의미하는 ‘관(官)’자 이름의 통일신라 기와가 발견됐다. 옛 도청사 부지가 단지 조선시대 전라감영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때부터 1300년 넘게 관청 자리였음을 보여준 것이다.

김승수 시장이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아시아 문화심장터 프로젝트를 언급하며 전주를 파리나 로마와 같은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겠다고 말한 자신감의 바탕에는 이런 오랜 역사가 있다.

◇조선왕조 발상지

전주 한옥마을의 연간 관광객이 1000만명을 넘어섰다. 한옥마을에서 사용된 이동통신 기록과 SNS, 카드매출기록 등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1년 동안 1067만명이 다녀간 것으로 집계된 것이다.

하지만 한옥마을과 그 주변이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후백제의 도읍지임을 알고 돌아가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일본인들이 1942년 전주부(全州府:조선시대 전주의 행정구역)의 역사서로 발간한 전주부사(全州府史)가 있다.

하늘에서 남서 방향으로 내려다 본 전주 한옥마을과 오목대. 위로 전주천이 흐르고, 아래로 기린대로가 지난다./뉴스1 DB

이를 전주부사편찬위원회가 일본인의 시각을 걷어내고 현실에 맞게 고쳐 ‘국역 전주부사’라는 이름으로 2009년 다시 펴냈는데, 한옥마을 동남쪽에 있는 오목대(梧木臺)를 소개하는 대목이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오목대) 광장에 비각이 하나 있는데 안에는 ‘태조 고황제가 머물렀던 옛 터’(太祖高皇帝駐畢遺址)라는 글과 고종의 글을 새긴 기념비가 서 있다. 오목대의 남동쪽, 자만동 계곡 철도선로 동쪽에도 역시 ‘목조대왕유허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는 고종의 글을 새긴 석비가 있는 비각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태조의 5대조인 목조의 주거지 터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조 고황제가 머물렀던 옛 터’라는 것은 1380년 이성계가 남원 운봉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전주로 개선하며 오목대 위에 종족을 모아놓고 축연을 베풀었다는 전설에 의한 것인데, 잔치에 흥취한 이성계가 한 고조(유방)의 대풍가(大風歌)를 소리 높여 불러 곧 자신이 대신할 고려의 말로를 야유하자 모두가 거기에 답하여 태조의 만세를 외쳤다.”

“당시 종사관이었던 포은 정몽주도 있었는데 눈꼴신 이 광경을 견디지 못하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만경대(萬景臺:만 가지 경치를 볼 수 있다는 뜻을 가진 곳으로, 한옥마을 남쪽 남고산성 근처에 있다.)에 올라 멀리 개경의 하늘을 바라보며 석벽제영(石壁題詠)의 시에 무량한 감회를 의탁했다.”

‘목조대왕유허지’라는 글은 전주이씨 시조인 이한(李翰)부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李安社)까지 살았던 마을임을 알리는 내용이다. 이 글이 적힌 석비가 있는 곳은 최근 벽화마을로 유명한 자만마을의 이목대(梨木臺)다.

전주 한옥마을 관광객들이 최근 즐겨 찾는 자만 벽화마을/뉴스1 DB

조선시대 왕들은 전주를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오목대와 이목대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전주부사에는 ‘전주는 예로부터 조선의 발상지로 알려졌기 때문에 태조의 진전(眞殿: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하는 곳)이 창설됐으며, 그것을 경기전이라 칭했다’라는 내용이 있다.

경기전은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돕기 위해 정몽주를 제거한 태종이 창건했다. 태종의 아들 세종은 경기전 안에 전주사고를 지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도록 했다.

현존하는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은 경기전에 보관 중이던 것이 유일하다. 다른 지역에 있던 태조 어진과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여러 위기 속에서 불에 타는 등 모두 사라졌다. 전주 사람들만이 이를 지켜냈다.

영조는 경기전에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조경묘(肇慶廟)를 만들었고, 오목대와 이목대 비문(碑文)을 직접 쓴 고종은 건지산에 이한의 묘역인 조경단(肇慶壇)을 조성해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전주 사람들은 그곳을 왕릉이라고 불러왔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1388년 고려 안찰사 최유경이 쌓았다는 전주부성(全州府城)에도 조선왕조 발상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주부성 안에는 경기전을 포함해 객사(客舍)와 전라감영(全羅監營) 등 주요 건물이 있었다. 객사는 지금으로 치면 정부 고위직이 출장을 나와 머물던 곳인데, 전주 객사는 특별히 풍패지관(豊沛之館)으로 불렸다. ‘풍패’(豊沛)는 한 고조 유방의 본향이다. 전주 객사에 이 ‘풍패’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전주가 태조의 본향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전주부성의 4개 문(門) 중 남쪽과 서쪽에 있는 문에 풍남문(豊南門)과 패서문(沛西門)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4개 문 중 현존하는 문은 풍남문이 유일하다.

후백제 때 축조된 동고산성 정문과 성 밖으로 물을 배출하는 수구시설/뉴스1 DB

◇후백제 도읍지

이목대가 있는 자만마을에서 승암산 정상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산성 하나가 나타난다. 1980년 이 산성을 발굴했을 때 전주성(全州城)이라는 글이 적힌 연꽃무늬 와당이 나왔다.

전주부사에 이와 관련한 기록이 있다.

“3000년 전 중국 주나라 초기에 반도의 북부 지방에 은(殷)의 왕족 기자(箕子)가 건너와서 세운 것으로 알려진 고조선국이 있었으며, 남쪽 지방에는 마한·변한·진한의 삼한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마한은 반도 남쪽의 서부 지방 일대의 비옥한 땅을 점하고 50여개 소국으로 분립돼 있었는데, 전주(全州)는 바로 그 중 한 나라에 속해 있었다. 백제 말기인 위덕왕 원년(540년대 초)에 비로소 서부에 있는 완산(完山)의 이름을 따서 완산주를 두게 됐다. 곧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귀속되었고 이로 인해 처음으로 전주라 개칭됐다. 뒤이어 신라 말기, 예전 백제 지방을 영유하고 일어난 후백제의 왕 견훤 시대에 이르러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900년) 대대적으로 부 내의 경역을 확장, 성벽을 수축하고 지금의 전주역(현재 전주시청) 동쪽 구릉 일대에 장대한 왕성을 건설했다.”

승암산 발굴조사 결과 견훤이 전주에 후백제를 세우고 산성을 쌓았다는 전주부사의 기록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견훤은 이 성만 쌓은 게 아니다. 한옥마을 남쪽 고덕산에는 남고산성을 쌓았다. 승암산 산성은 남고산성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고산성으로 불린다.

최근에 후백제 도성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

전주 후백제문화사업회 위원장을 지냈던 고(故) 전영래 원광대 교수는 ‘후백제 견훤정권과 전주’라는 책에서 “후백제 도성의 특징은 승암산을 정점으로 하고, 기린봉을 거쳐 성황당에 이르는 동곽 구릉지대의 자연 방어선을 거쳐 반대봉에서 구 형무소(현재 전주동부교회)에 이르는 활 모양을 이루고, 다시 오목대에서 구 형무소에 이르는 구 전라선 철도를 따라 내려가는 토류를 현(弦:활시위)으로 하는 이른바 반달형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견훤이 구 전라선 철도 동쪽 구릉지대에 삼국시대 당시 보편적인 형태였던 반달형 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후백제 도성의 위치와 관련한 고 전영래 교수의 주장은 “지금의 전주역(현재 전주시청) 동쪽 구릉 일대에 장대한 왕성을 건설했다”는 전주부사의 기록과 비슷하다. 국립전주박물관의 연구 결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립전주박물관이 항공사진과 일제시대 지도 등을 통해 확인한 후백제의 성곽과 방어체계. 가운데 빨간색의 궁성 부분은 천사마을 일대이며, 그림 중앙이 전주부성이다. 전주부성 동남쪽에 한옥마을, 오목대, 이목대가 보인다./뉴스1 DB

견훤이 머문 왕궁은 어디에 있을까. 1980년 전주성 기와가 나온 동고산성, 아파트 건립이 한창인 물왕멀, 매년 연말이면 천사가 나타나는 천사마을 일대인 인봉리, 위화도 회군 때 만들어졌다는 전주부성까지 다양한 주장이 있으나 아직까지 확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전주시가 이 일대에 대한 조사에 나서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견훤은 왜 한옥마을 서쪽 전주부성 자리가 아닌 한옥마을 동쪽에 성을 쌓았을까. 여기에 재미있는 사실이 숨어 있다. 전주천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전주부사 등 여러 기록을 보면 전주천 물길은 견훤이 900년 후백제를 세울 당시 한옥마을 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한벽당 앞에서 남부시장이 있는 서쪽으로 바로 꺾인 지금과 달리 오목대를 돌아 기린대로를 따라 전주시청이 있는 북쪽으로 흘렀다는 것이다.

전주천의 비밀은 견훤이 당시 오목대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전주천을 활시위(弦)로 삼아 동쪽으로 배가 부른 반달 모양의 성을 쌓았다는 주장의 타당성을 입증할 열쇠가 된다.

900년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935년 후계 문제로 갈등을 빚은 장남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金山寺)로 유폐됐다 달아나 왕건을 찾았다. 후백제는 1년 뒤 936년 왕건에 의해 멸망했다. 견훤도 그해 사망했다.

◇1300년 전주 시가지 역사

“짐작컨대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동쪽을 흘렀을 전주천의 강변에 조그맣지만 시장이 형성돼 물물교환을 시작한 것이 후세 전주라 불리게 되는 취락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굳이 그것을 역사적으로 살펴보자면 멀리 마한(馬韓)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될 것이다. <중략> 신라 말기, 즉 지금으로부터 약 1000여년 전, 대략 예전 백제 지방을 영유하고 일어난 후백제의 왕 견훤 시대에 이르러 특히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대대적으로 부 내의 경역을 확장, 성벽을 수축하고 지금의 전주역 동쪽 구릉 일대에 장대한 왕성을 건설했다. 이후 신흥 전주에는 40여년 동안에 걸쳐서 신라의 경주 및 고려의 국도인 개경에 맞서 남쪽에서 제일가는 번화가가 출현하게 된다.”

전주부사는 ‘전주 시가지의 창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전주천과 남부시장, 풍남문, 전주부성의 과거와 현재 모습 ⓒ News1 김춘상 기자

유철 전주문화유산연구원장은 지난해 11월2일 옛 도청사 부지에서 전라감영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통일신라는 685년(신문왕 5년) 전국 행정구역을 9주 5소경으로 조직했는데, 그때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가 생겼다”면서 “이번 발굴조사에서 당시 완산주 관청을 의미하는 ‘관(官)’자 이름의 기와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옛 도청사 부지가 단지 조선시대 전라감영 부지일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때부터 2005년 전북도청이 완산구 효자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1300여년 간 관청 자리였다는 주장이다.

전주부사는 “전주 발전의 연혁은 이곳을 관류하고 있는 전주천의 변천에 좌우돼 왔다”고 강조한다. 전주 시가지가 전주천 물길 이동을 따라 한옥마을 동쪽 후백제 도성에서 한옥마을 서쪽 전주부성 쪽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전주천 물길의 이동과 함께 1300년 넘게 한옥마을 주변에 형성된 전주 시가지. 김승수 시장이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추진하는 아시아 문화심장터 프로젝트의 주요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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