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풍성한데 씨앗은 텅텅…한라산 구상나무 번식의 역설 첫 규명
열매 풍성한 해일수록 씨앗 속 텅 비어
"흉년에 고품질 종자 집중 수집해 보전"
- 오미란 기자
(제주=뉴스1) 오미란 기자 = 멸종위기종인 한라산 구상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는 해일수록 오히려 속이 빈 씨앗이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겉보기에는 풍년이지만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는 건강한 종자는 줄어드는 이른바 '풍년의 역설'이 확인된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한라산연구부는 국립백두대간수목원과 함께 2022년부터 올해까지 5년간 한라산 구상나무 기초 생태 연구를 진행한 결과를 19일 발표했다.
연구진은 한라산 10개 조사구에 자생하는 구상나무 성숙목 100그루를 대상으로 생육 형질과 연도별 암꽃 생산량, 종자 내부 건전성 등을 살폈다.
조사 결과 구상나무는 3년 주기로 결실량이 오르내리는 해거리 현상을 보였다. 2022년과 지난해에는 열매를 많이 맺었지만, 2023년과 2024년, 올해는 결실량이 전년의 10% 수준으로 급감했다.
문제는 열매가 많이 열린 해에 씨앗의 질이 함께 떨어졌다는 점이다. 흉년이었던 2024년 58.76%였던 윗세오름 구상나무 종자 충실률은 지난해 29.97%로 절반 가까이 낮아졌다.
한라산연구부는 구상나무가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은 열매를 맺을 경우 양분이 분산되면서 속이 차지 않은 빈 종자가 늘어나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른바 '자원 희석 효과'가 나타났다는 설명이다.
종자의 건전성은 해발고도와 입지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해발 1600m대인 성판악과 왕관릉, 방에오름 일대는 대풍년 때 나무 한 그루당 300개 안팎의 꽃을 피우면서도 종자 충실률을 50~60% 이상 유지했다. 이들 지역은 한라산 구상나무의 핵심 종자 공급원으로 확인됐다.
반면 저고도에 있는 영실·큰두레왓과 기후 스트레스가 큰 성판악 최상부는 쇠퇴 지역으로 진단됐다.
한라산연구부는 이번 연구 결과를 토대로 구상나무 보전 전략을 다각화하기로 했다. 대풍년에는 핵심 종자 공급원으로 확인된 우세목에서 유전자원을 다량 수집하고, 흉년이나 평년에는 고고도 건전목에서 속이 꽉 찬 고품질 종자를 집중 확보하는 방식이다.
또 유관기관과 함께 구상나무 종자의 건전성을 판단할 수 있는 '종자 품질 표준 지표'도 마련할 계획이다.
김형은 제주도 세계유산본부장은 "열매의 겉모습뿐 아니라 씨앗 속이 차 있는지까지 따져 한라산 구상나무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을지를 과학적으로 짚었다"며 "발아와 어린나무 정착까지 전 과정을 데이터로 쌓아 한라산 아고산대 침엽수림을 지키는 보전 지표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소나무과 전나무속 식물인 구상나무의 공식 학명은 'Abies koreana Wilson'이다. 식물학자 어니스트 윌슨이 1920년 한국에만 분포하는 고유종으로 발표했다.
구상나무는 현재 한라산과 지리산에 주로 자생한다. 최근에는 속리산과 가야산, 소백산, 금원산, 역축산 등에서도 자생지가 확인됐다.
그러나 겨울철 기온 상승과 봄철 수분 부족 등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개체군 쇠퇴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구상나무는 2012년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됐다.
mro1225@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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