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아침의 전쟁, 저녁의 평화
맹모, 제주에 가다 - 이진주의 탐라일기·22
서울 '마마토모'에서 제주 '맹모'가 되기까지
한 이틀 비가 내리더니 확 가을입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데, 기껏 제주에서 방목중인 저희 집 소구리는 도무지 살이 붙을 기미가 안 보이네요. 개학 첫날이었던 지난 월요일부터 오늘까지 새벽 댓바람에 일어나 아침상을 차렸더니, 소구리란 놈, 식탁머리에서 몸을 배배 꼬며 제 에미헌테 말허는 꼬라지를 좀 보시라죠.
아침의 전쟁
<개학날 부모님의 모습>이란 제목으로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사진입니다(이런 류의 사진들이 그렇듯 저작권은 모르겠어요. ㅠ.ㅜ). 한국 학교들이 개학한 8월 중순쯤 쫙 퍼졌던 걸 저는 이제야 봤네요. 아들 셋 엄마... 어이쿠! 저 애들 표정들 좀 보세요. 사고 깨나 치게 생겼어요. 특히 저 둘째 눈빛이...
4학년이 된 첫날, 소구리는 새벽 여섯 시 전후로 알람 네 개를 맞춰놓고 일어났어요. 저도 덩달아 긴장해 욕심껏 이것저것 차렸습니다. 우유, 요플레, 치즈, 베이컨, 바나나, 방울토마토에 이어, 심혈을 기울인 계란 프라이를 내놨죠. 평소 소구리가 즐기는 ‘써니 사이드 업(계란을 뒤집지 않고 그대로 익혀, 노른자가 햇님처럼 방긋하게 보이도록 한 요리법. 간단히는 안 뒤집은 계란 반숙.)’ 스타일로요. 소구리는 요플레 숟가락으로 노른자만 쏙 빼 먹으면서 말했어요. “엄마, 왜 평범한 계란인데 토가 나오려고 하지?” 흰자까지는 못 먹겠으니 남기겠다는 뜻이었죠. “야, 이 강아지 쉐이야, 그만 먹어!” 소리가 절로 나오려는 걸, 첫날이라고 꾹 눌러 담았습니다. 웃으면서 학교 보내야지요, 꾸욱.
개학 이틀째, 어제 아침 꼴을 보다 못해 곰서방이 친히 나서서 아침상을 차렸습니다. 우유, 요플레, 바나나는 기본 메뉴였고요, 동네에 처음 생긴 유기농 가게에서 사온 한라봉 원액 주스, 바짝 튀긴 치킨 너겟 다섯 알을 더 내놨어요. 제가 “밥을 굶더라도 학교는 가야 한다” 주의자라면, 곰서방은 “밥을 안 먹으면 학교도 못 간다” 주의자라서요. 소구리는 아빠가 무서워 찍소리도 못하고 다 먹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평소엔 한 시간을 줘도 안 끝나는데, 이날은 모처럼 집중해서 먹은 덕분에 시간이 좀 남았죠. 둘이 나란히 쓰레기 분리수거까지 하고 셔틀버스 정류장으로 뛰려는 참에, 소구리가 제 팔을 잡는 거예요. “엄마, 뛰지 말자. 아까 먹은 거 토 나오려고 해!” 어째 오늘은 토 나온다 소리 안한다 했어요. 그래도 아빤 무서운가 보죠, 면전에선 못하고.
사흘째 날, 곰서방은 전처럼 “요구리를 맡겠다”며 애기를 껴안고 자고, 제가 다시 부엌으로 나갔어요. 우유, 요플레, 바나나 3종 세트에 더해 포도와 삶은 호박 1/6쪽을 내놨지요. 단 것 좋아하는 소구리를 위해 유기농 아가베 시럽도 준비했고요. 그런데 소구리는 엄마가 만만한지, 이날도 영 먹는 속도가 안 나는 거예요. 결국 바나나와 호박 1/12쪽만큼을 남겨놓고선, 포도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어요. “엄마, 이 포도가 나한테 먹히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지 않아?” 헐~
곰서방은 소구리의 식단에는 질보다 양이라며, 절대적인 칼로리량을 늘리기 위한 특제 처방을 내렸습니다. 바로 단백질과 탄수화물 보충제죠. 단시간에 살을 찌워 근육을 늘리려는 분들이 목표의식을 갖고 먹는 걸, 가뜩이나 입 짧은 소구리에게 먹이려는 시도는 난항을 겪고 있어요. 이 사진은 단백질 함량을 높였다는 시판음료 쉐이*입니다. 현아가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는 바로 그 제품요. 이런 건 잘도 사먹으면서, 왜 집에서 해주는 곰표 특제 쉐이크는 안먹느냐고요. (사진제공=서울우유)
마의 수요일이 지나고, 목요일 아침부터는 확실히 힘이 쭉 빠지긴 하더라고요. 곰서방이 소구리 식단에 대해 내린 결론은 “질보다 양!”이었어요. 칼로리의 절대량이 부족하니, 그냥 아무 거나 먹이라는 거예요. 유기농이고 나발이고 따지지 말고, 햄버거든 라면이든 무조건 먹이라고요. 피트니스 하는 양반들이 빠르게 몸을 불릴 때 먹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혼합물 있잖아요. 쟁이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벌크업 사료’라고 불리는 체중증가용 보충제 말씀이에요. 안 그래도 곰서방이 개중 제일 검증된 제품으로 세 가지 맛-딸기맛, 초코맛, 쿠키앤크림맛-을 미리 주문해 뒀었죠. 이런 보충제들이 사실 좀 맛이 역해요. 인공향이 강해서 비위가 약한 저 같은 사람은 잘 못 먹습니다. 소구리도 마찬가지였어요.
이날은 그나마 제일 맛이 좋은 쿠키앤크림을 골라 우유에 타서 바나나를 넣고 갈았어요. “엄마, 이게 뭐야?” “쉑, 쉑, 쉑, 쉑 쉐이*이다. 이 쉐이야~ 이름이 뭐예요? 나나나나나 나나나나~” 강남역에서 저랑 소구리랑 나란히 사먹었던 ‘스무*킹’도 따지고 보면 이런 종류잖아요. 그때는 기를 쓰고 단백질 파우더 추가해서 먹더니만, 집에서는 입이 급격히 짧아지는 병이 또 도진 거예요. 형님 덕분에 덩달아 일찍 일어난 요구리도 한 잔을 홀랑 다 마시는데, 우리 소구리는 그거 하나를 한 시간 동안 나눠 마셨다는, 그리고 울고 싶은 표정으로 화장실에 한 번 앉았다가 학교에 갔다는... 그래, 토 나오는 거 참느라 애썼다.
그리고 닷새째인 금요일, 단백질 가루를 이틀 연속 먹는 건 좀 가혹하다 싶어서, 오늘은 평범한 메뉴로 돌아왔지요. 대신 양을 확 줄여서 우유와 요플레, 바나나, 핫도그, 계란 프라이만 내놨습니다. 소구리에게 “마음을 들켰던” 포도 아가씨도 다시 꺼내봤는데, 소구리의 반응은 그대로였어요. “엄마, 포도가 이제 발효가 된 것 같아. 차라리 포도주를 담그면 어떨까?” 먹기 싫으면 그냥 먹기 싫다고 하라니까. 이리저리 에둘러 말하니까 어지러워 죽겠다. 남자가 말이야. 좀 솔직하고 화끈한 맛이 있어야지!
결국 지난주 내내 저희집에서는요, 식탁머리에서 백화점 사장은 못 갈아치우고(SBS 드라마 <황금의 제국>), 신문을 읽으며 시사대담을 벌이지는 못할지언정(유대인의 자녀교육법),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대화를 나누며 아이에게 기를 실어 주겠다는 소박한 다짐마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먹어! 이 가이쉐이야~” 윽박지르는 엄마 아빠 앞에서, 먹기 싫은 소구리의 핑계만 더 현란해졌을 뿐이죠.
저녁의 평화
위 사진과 함께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개학날 부모님 표정 다른 버전이에요. 스쿨버스를 배경으로 엄마 아빠가 축배를 들고 있는 모습이지요. 소구리 덕분에 기상시간이 확 당겨진 저희 부부 표정은 좀 다릅니다만. 대신 낮 동안 제 신수가 훤해졌어요. 아침의 전쟁, 저녁의 평화인 셈이죠.
아침부터 이렇게 푸닥거리를 한 판 하고 나면, 종일 후회가 되는 거예요. 내가 한 마디만 참았으면 애가 신나서 학교에 갔을 텐데, 엄마 때문에 괜히 시무룩해져서 오늘 하루를 망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요구리를 안고 낮잠을 한 시간 자고 일어나면 그런저런 걱정들도 제 머릿속에서 싹 휘발되더라고요. 요구리랑 노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어서요. 더구나 형아 따라 일찍 일어나면서 리듬이 확 깨져버리니까 낮잠 자는 시간대도 못찾고 며칠은 좀 힘들었지요. 아침 한 번 먹고 점심 한 번 먹이고, 빠방(자동차) 좀 갖고 놀다가 스티커 좀 붙이고 나면, 금세 소구리 올 시간이 되더라고요. 그래도 방학 때보다는 한결 수월해서 아, 엄마들이 이 맛에 학교 보내는구나, 하는 새삼스런 깨달음을 얻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수영강습이니 영어도서관이니 라이드 안 하니까 살겠더라고요!
아침의 전쟁에 대한 휘발성 기억력은 소구리도 마찬가지였는지, 녀석은 지난주 내내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뭔가 할 말이 가득한 표정으로 셔틀버스에서 뛰어내렸어요. 아이가 물고 오는 이야기란,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엄마, 나는 김씨고, OO이는 조씨라서 (가나다 순으로 반을 나누면) 같은 반이 안 될 줄 알았잖아. OO이는 역시 우리반이었어. 이히히~” OO이는 소구리가 제일 좋아하는 수학귀신 친구예요. 그 왜, 비밀 수학선생님이 돼서 친구들에게 수열의 기본원리를 가르쳐줬다던 아이 말예요. 성격이 조용하면서도 할 말은 조목조목 해서 인기가 많았어요. 소구리가 이 친구에게 확 기운 결정적인 계기는, 다른 아이들이 “소구리는 안경발(!)”이라고 놀려 속상했을 때 그러지 말라고 지지해 준 거였대요. 아, 안경발이라니, 그건 엄마도 인정한다. 미안하다, 소굴아. 제가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고 “배용준도 안경발”이라고 위로해봤지만, 아이의 마음에 전혀 가닿지 않았던 것 같더라고요. 요즘 애들 고민 1순위가 미모(와 공부)라더니, 벌써.
“배용준이 누구야? 유재석만큼 유명해?” 쿠쿵~ 이런 게 세대차이로군요. “얼굴로는 장동건 찜 쪄 먹었던 아저씨 있어. 장동건도 모르나? 그럼, 원빈? 현빈? 주원? 고수? 공유?...” “엄마, 그런데 사람 이름이 왜 다 두 글자야?” “(지금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그건 나도 모른다, 이 자쉭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소속사에 물어봐.” 아무튼 이 녀석이 그 친구를 얼마나 좋아하느냐면, 1, 2학기 내내 자칭 타칭 여친이었던 어느 여학생이 3학기 때 OO군에게 마음이 기울자, “어, 나도 OO이를 좋아하는데! 너도 좋아하는구나. OO이는 참 좋은 친구지.(에엥?)”하며 깨끗이 단념했을 정도였지요. 사랑보다 우정이라니, 대.다.나.다!
사실 4학년 반 배정의 윤곽은 인터넷 학사 관리시스템에 이미 나와 있었어요. 엄마들이 며칠 전 서로 연통(?)을 돌린 덕분에 대강은 알고 있었고요.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두 반으로 나뉘었고, 두 선생님 다 신망 높은 분들이어서 어디든 상관이 없었어요. 소구리가 같은 반 친구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들을 때마다 “예이~!” 하고 환호성을 지르기에 다행이다 싶었는데,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좀 불안했나 봐요.
새로운 시작 소구리가 제비새끼 박씨 물고 오듯 물어오는 얘기란 또 이런 거지요. “엄마, OO이는 유럽 잘 갔다 왔대. 캠핑카를 타고 한 바퀴 돌았대.” 그러고는 유럽 얘기를 할 줄 알았더니, 운동장에서 같이 축구하고 논 얘기를 실컷 하더라고요. 그 친구가 엄청 화력이 세서 며칠째 자기네 반이 운동장 점유권을 쥐게 됐다고 신이 난 거죠. 이제 같은 학년이 두 반이라 반 대항전 같은 것도 할 수 있겠네요. 지난 일 년 동안 학교에 가져갔다 두고온 축구공만도 어언 세 개째. 실력이 안 늘면 이상한 거죠.
축구하러 학교 다니는 녀석이 이번 학기에는 무슨 일인지 클럽활동을 농구와 배구로 신청을 했더군요. 축구는 쉬는 시간에도 많이 하니까 새로운 구기 종목을 배우고 싶대요. 농구에는 고학년이, 배구에는 여학생이 많은데도 말이에요. 이제 학교 다니는 이유가 두 가지 더 늘겠군요. 5학년이 되어 야구와 럭비까지 배우면 아예 기숙사에서 살겠다고 하겠어요.
“엄마, OO이는 예쁜데 좀 새침해. 며칠 전엔 잘 놀았는데 오늘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자기 엄마한테 이른대. 이제 그만 좋아해야 할까봐.” 말은 그래도, 귀가 빨개진 것이 여전히 심장이 바운스~ 바운스~ 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번역하자면, 엄마, 도대체 여자들은 왜 그래? 정도가 되겠네요. 소구리가 옷을 여기저기 벗어놓고 세탁기에 안 가져다놓는 버릇이 있는데요, 곰서방이 “네가 싸질러놓은 ‘옷똥’ 사진을 찍어서 그 여자친구에게 보내겠다”니까 질색 기겁을 하고 싹 치웁니다. 아직 좋아하는 거 맞네요~
남자아이들이 열광하는 <마인크래프트>. 도대체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는데, 이걸로 금세 친구도 사귑니다. (사진=마인크래프트 홈페이지)
그리고 새로운 친구 얘기도 합니다. 셔틀버스에서 만난 다른 반 새 친구 OO는 3월이 생일인데, 벌써 소구리를 초대했대요. 서로 마음에 들었나 보죠. 도대체 뭔 얘기를 하나 했더니 게임 얘기입니다. <마인크래프트>를 컴에 깔았느니, 폰에 깔았느니, 에라이, 이놈들아! 같은 반 친구들 일곱 명도 다들 순하고 괜찮대요. 특히 여학생 D는 볼에 자두 한 알이 들어있는 듯 통통해서 귀엽고, 여학생 E는 얼굴이 퍽 예쁘장하대나 뭐라나요~ 얌마, 김소굴. 자꾸 범위를 확산시키지 말래두! 그렇게는 아무도 못 만난다니까~
이제 모든 엄마들이 궁금해 하는 바로 그 질문, “담임 선생님은 어떠시냐”로 넘어왔네요. 소구리는 눈부터 웃으며 엄지손가락 두 개를 떡 내밉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투 썸즈 업’? 학창 시절에 처음 만난 남자 선생님, 더구나 숙제가 없기로 유명한 분.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소구리는 천국에 온 거죠. 이히히~ 덕분에 완전 자가 발전해서요, 웬일로 도서관에서 책도 두 권이나 빌려와 하루만에 다 읽어치웠습니다. 유치원 친구들은 진즉에 읽고 지나간 챕터북이긴 했지만요.
“이야, 우리 소구리가 4학년 되더니 달라졌구나.” “여보, 여보, 우리 소구리가 4학년 되더니 저렇게 책을 읽어요.” 이렇게 한 두어 번 추임새를 넣어줬더니, 다음 주 오케스트라 오디션에 참여할 첼로 연습도 한 번 했답니다. 수도 없이 ‘삑사리’가 나긴 했어도, 그게 어디예요. 그렇게 싫다고 버티더니 오디션을 보겠다는 말이라도 해준 것만도 감지덕지죠. 방학 중에도 엄마들의 문의가 빗발쳤다는 오케스트라 오디션은, 결과가 추석 전에야 공개된다고 해요. <슈스케> 60초도 감질나는데, 어쩌나! 이번 학기엔 오디션 참여자도 많고, 확충인원도 많아서 확률은 50%래요. 붙든 떨어지든 소구리한테는 좋은 계기가 되겠지요. 아예 놓아버린 줄 알았던 첼로를 다시 잡은 것만도 절반은 성공한 셈이에요.
여름내 아꼈던 비가 내립니다. 상토를 여덟 포대나 부어넣고도 아직 다 채우지 못한 베란다 화단에 아쉬운 대로 허브와 야생화 씨앗들을 뿌렸는데요, 저 비를 맞으면 요행히 몇은 싹을 틔우겠네요. 억지로 잡아당기지 않고, 당분간 물이나 주며 지켜보렵니다. 소구리도, 새싹들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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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서울대 국어교육과와 같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에서 공부했다. 서울에서 중앙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지난해 남편과 제주로 내려와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왕년의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성과 모성에 관심이 많다. 도 닦듯 엄마 노릇을 마친 뒤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독립할 작정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학교를 짓고,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동화를 쓰는 것이 꿈이다.[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