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0주년을 말하다⑪] 전두환 무기징역·노태우 징역 17년 판결
대법원 "5·18 헌정질서 수호 위한 정당행위"
발포명령자 등 못밝혀…全·盧 8개월 만에 사면
- 전원 기자
(광주=뉴스1) 전원 기자 = 5·18민주화운동 학살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1994년부터 고소와 고발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994년 3월 서울 기독교회관에서는 '5·18진상규명과 광주항쟁정신 계승 국민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책임자 고소·고발사업, 광주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등을 목적으로 5월부터 활발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결국 1994년 7월 294명의 연서로 전두환씨와 노태우씨 등 35명을 서울지방검찰청에 고소 및 고발했다.
하지만 1년여의 수사 후 검찰은 전씨와 노씨에 대해 '공소권 없음' 처분을 내렸고, 나머지 33명의 피고인에게도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시민단체와 학생운동단체 등이 강하게 반발하는 한편 헌법소원을 제출하는 등 법률적 대응을 펼쳤다. 책임자 처벌운동은 더욱 격화됐고, 1995년 10월26일 '5·18학살자처벌 특별법 제정 범국민비상대책위원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5·18 진상규명과 함께 신군부의 부정비리 청산도 함께 주장했다.
1995년 1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존재하는 어둡고 비극적인 과거를 청산하겠다'는 공약과 함께 같은달 24일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11월30일 검찰은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했고, 수사를 다시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전씨는 "정치 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헌정사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길 것"이라며 "국민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발했다.
또 일명 골목성명을 통해 "나는 검찰소환에 절대 응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대검찰청이 아닌 국립서울현충원에서 5분간 참배한 뒤 고향으로 내려갔다.
검찰은 전씨의 행동을 도주로 간주하고 12월3일 법원에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전씨를 구인, 안양교도소로 데리고 갔다. 반면 노씨는 검찰소환에 응해 조사를 받고 구속됐다.
노씨는 역대 대통령 중 구속된 첫번째 대통령이 됐고, 전씨는 두번째 대통령이 됐다.
수사를 벌인 검찰은 두 사람을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에 넘겼고, 1996년 8월6일 검찰은 전씨와 노씨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이에 법원은 8월26일 열린 선고공판에서 '내란 및 군사 반란 사실 등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며 전씨에게 사형을, 노씨에게 징역 22년6개월을 각각 선고했다.
같은해 12월16일 진행된 항소심 선고에서 전씨는 군 형법상 반란죄와 내란죄, 뇌물수수 등을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고, 노씨에게도 같은 혐의로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또 전씨와 노태우씨가 재임 중 기업체 등으로부터 뇌물로 거둬들인 2205억원과 2628억원을 각각 추징했다.
1997년 4월17일 대법원은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전씨에 대한 검찰의 상고를 기각, 2심의 형이 확정됐다.
당시 두사람의 죄목은 반란수괴,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불법진퇴, 초병 살해, 내란수괴, 내란모의참여, 내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목적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뇌물) 등이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한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해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해 그들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1980년 5월 당시 발포명령자가 누구인지, 행방불명자가 어디로 갔는지 등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못했다.
8개월 뒤인 1997년 12월22일 전씨와 노씨는 모두 사면을 받았다.
사면을 받은 뒤 노씨는 '광주사태는 중국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의 망언으로 국민적 공분을 샀고, 결국 잘못을 사과했다.
하지만 노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12·12 군사반란과 5·17내란, 5·18 학살에 대해 반성하기 보다는 왜곡으로 정당화를 시도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junw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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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1980년 5월 한반도 서남권의 중심도시인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5·18 40주년을 맞아 40년 전 당시 현장을 지켜낸 이들을 통해 그날의 참상을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