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지러워도 어김없이 나타난 '평범한 천사들'(종합)

전주 얼굴없는 천사 26년 째 성금…완주서는 쌀 60포대 기부
폐지 줍고 아껴 모은 돈도 선뜻 내놔…"먹고 산 건 다 이웃 덕분"

전주 얼굴없는 천사가 놓고 간 상자.(전주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뉴스1

(전국=뉴스1) 이시우 임충식 유승훈 기자 = 영하 8도의 매서운 추위가 덮친 지난 26일 아침, 전북 완주군 용집행정복지센터 입구에는 10kg짜리 백미 60포대가 쌓여 있었다. 차곡차곡 쌓인 쌀 포대 위에는 한 통의 편지가 놓여 있었다.

편지에는 "가장 외지고 어두운 곳에서 고단한 시간을 보내는 이웃들에게 사랑의 온기를 전하고 싶다.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용진읍민들의 삶이 희망과 용기로 풍성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고달프고 퍽퍽했지만 돌이켜보면 누군가로부터 위로받은 순간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연말, 평범한 이웃과 얼굴 없는 천사가 내민 따뜻한 손길이 추위를 녹이고 있다.

지난 22일에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발신 번호가 제한된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는 "모금함에 성금을 두고 간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모금함에서는 성금 5352만 7670원과 손 편지가 담긴 상자가 발견됐다.

손 편지에는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우리 이웃들이 웃고 즐거웠던 시간보다는 아프고 슬프고 우울했던 시간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며 "더 힘들게 투병 생활을 하는 난치병 환자와 가족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글이 담겨 있었다.

경북 경주시 성건동에 행정복지센터에서는 신원을 밝히지 않은 70대 여성이 30만 원이 든 흰 봉투를 건넸다. 폐지를 팔아 돈을 모은 이 여성은 "내가 받은 도움을 조금이라도 다시 돌려드리고 싶었다. 내 몸은 조금 고달파도 이 돈이 누군가에겐 따뜻한 밥 한 끼, 훈훈한 방 한 칸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다.

완주군 용진읍 ‘얼굴 없는 천사’가 놓고 간 쌀 포대.(완주군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뉴스1

2025년의 마지막을 이틀 앞둔 30일에도 '얼굴없는 천사'는 어김없이 나타났다.

전주 노송동 행정복지센터에는 이날 익명의 기부자가 전화를 걸어 "기자촌 한식뷔페 앞 소나무에 상자 1상자를 두었으니 좋은 곳에 써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얼굴 없는 천사가 말한 장소에는 돼지저금통과 "2026년에는 좋은 일들만 있었으면 합니다.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메모가 남겨 있었다.

이 기부자는 '전주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로 불리며 26년째 말없이 이웃을 위한 성금을 매년 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웃을 향한 선행은 지역과 시간, 재산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기부의 이유는 다르지만 당부는 한결같이 이웃에게 향한다.

충남 아산에서 농약사를 운영했던 황주헌(90) 씨는 지난 29일 아산시청에서 성금 2000만 원을 기탁하며 그 이유를 넌지시 밝혔다.

그는 "아내가 살아 있을 때 '우리가 이 동네에서 장사하며 먹고살 수 있었던 건 이웃들 덕분'이라는 말을 늘 했어요. 아내는 8년 전 먼저 떠났지만 그 말을 가슴에 품고 살아요"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아끼고 절약해서 모은 돈을 어떻게 의미 있게 쓸지 오랫동안 생각하다가 아내와 함께 이 동네에서 받은 사랑을 돌려드리는 게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어요"라고 덧붙였다.

한편, 지난 1일부터 '희망2026년 나눔캠페인'을 진행 중인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는 30일 현재 전국에서 3722억여 원의 성금이 모여 나눔온도 82.7도를 기록 중이다. 캠페인은 내년 1월 31일까지 이어진다.

issue78@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