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음식점 '영문 메뉴판' 급증…"관광객 반응이 달라졌다"

"Welcome to Gyeongju!"…다국어 메뉴판이 바꾼 거리 풍경

APEC 정상회의를 앞둔 23일 오후 경주시를 들어가는 입구부터 경주시 관계자들이 도로 정비를 하고 있다. 2025.10.23/뉴스1 ⓒ News1 김대벽기자

(경주=뉴스1) 김대벽 기자 = 오는 27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시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도로 정비가 부산한 모습이다.

APEC 정상회의 개회를 닷새 앞두고 경주 보문단지 일대 도로 표지판엔 'To APEC CEO Summit Venue'(APEC 정상회의장 가는 길)란 문구가 붙었고, 호텔 주변에도 다국어 환영 현수막이 걸렸다.

비 내리는 23일 오후, APEC 정상회의 개최지인 경주 보문단지는 일반인 출입 통제로 한산한 반면, 도심은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황리단길의 한 식당 입구엔 불고기 정식과 김치전, 막걸리를 뜻하는 'Bulgogi Set' 'Kimchi Pancake' 'Makgeolli(Korean Rice Wine)'라고 영어로 적힌 메뉴판이 걸려 있었다. 이곳에선 점심시간을 앞두고 캐나다, 베트남, 태국 등 관광객이 줄지어 앉아 주문을 기다렸다.

이 식당을 10년째 운영 중이라는 김모 씨는 "작년만 해도 외국 손님이 오면 번역기를 돌리느라 진땀을 뺐다"며 "요즘은 영어, 일본어, 중국어 메뉴판을 다 만들어 놓으니 주문이 훨씬 빨라지고 표정도 밝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외국 손님들이 '이건 매운가요?' 대신 'How spicy?'라고 물으면 손짓으로 바로 설명해 준다. 서툴지만 소통이 된다"며 웃었다.

이 같은 '글로벌 손님맞이' 분위기는 황리단길뿐 아니라 보문단지, 동부사적지 일대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경주시가 지난 8월 시작한 'APEC 다국어 환대 서비스 캠페인'에 따라 시내 주요 음식점 800여곳이 자발적으로 영문·일문·중문 메뉴판을 제작했다. '비빔밥'보다 'Bibimbap'이 익숙해질 정도로 일대 상인들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특히 APEC 회의 기간 예상되는 외국인 방문객 1만여 명을 위해 다국어 메뉴판 도입 업소 300곳을 '글로벌 친절업소'로 지정했다. 이 업소엔 통역 QR코드, 외국인 결제 지원, AI 번역 안내가 결합한 서비스도 시범 도입됐다.

보문호 인근의 한식당은 최근 메뉴판을 전면 교체했다. 대표 메뉴 한우 불고기 정식에 'Bulgogi Set (Korean BBQ Beef)'란 영어 이름을 붙이자 주문이 늘었다고 한다.

보문단지의 한 카페는 메뉴판에 QR코드를 붙여 고객이 스마트폰으로 영어, 일본어, 스페인어 중 원하는 언어를 선택하면 바로 번역된 메뉴를 볼 수 있게 했다.

이 카페 직원 이수진 씨(32)는 "요즘 하루 손님 10명 중 4명은 외국인"이라며 "특히 유럽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커피, 디저트뿐 아니라 '고구마 라떼' '인절미 케이크' 같은 전통 메뉴도 인기를 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주시내 분식집 벽에도 떡볶이, 김밥을 영어로 'Tteokbokki (Spicy Rice Cake)', 'Kimbap (Seaweed Roll)'이라고 적어 놓은 메뉴판이 붙어 있었다.

이 가게 주인 박모 씨(54)는 "외국 손님이 김밥을 주문하면서 'Can you make it vegetarian?'(채식으로 가능하냐)라고 물을 땐 깜짝 놀랐다"며 "외국인 손님들이 김밥을 3줄씩 포장해 가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주의 모든 식당 메뉴가 영어로 바뀐 건 아니다. 미국에서 온 관광객 제임스 씨(35)는 "메뉴를 이해할 수 있으니 낯설지 않다"며 "사진이 함께 있어 '비빔밥' '된장찌개' 같은 (한국) 전통 음식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태국에서 온 여행객 수차리 씨(28)도 "매운 음식 정도를 영어로 미리 표시해 줘 선택하기가 편하다”며 "한국 음식이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전했다.

경주 첨성대 인근의 한식당 주인도 "옛날엔 외국 손님이 오면 눈치만 봤지만, 이젠 먼저 'Welcome to Gyeongju'(경주에 온 걸 환영합니다)고 인사한다"며 "그 한마디가 도시의 격을 바꾸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북도와 경주시는 APEC 정상회의 이후에도 이 같은 분위기를 살려 '글로벌 경주'의 출발점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경주시청 관계자는 "APEC을 계기로 관광, 숙박, 음식점의 글로벌 서비스 표준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며 "행사 이후에도 다국어 표기와 외국어 메뉴판을 확대해 ‘글로벌 경주’ 기반을 지속적으로 다질 계획이다"고 말했다.

dbyuck@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