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도성 따라간 남산…자연병풍 속 서울 야경 '핫플'

혜화문~흥인지문~남산~숭례문~돈의문 10㎞…격동의 역사 새겨진 길
대한제국 근대도시-현대 빌딩 공존 정동…불탄 남대문 '멍든' 국민 가슴

한양도성 낙산의 가을 풍경. 가까이 낙산의 단풍숲과 한양도성 옆으로 주택들이 빼곡하고, 오른쪽에 달동네를 재개발한 아파트들이 하얗다. 가운데는 백악산 산줄기, 그 너머는 북한산.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지난주에서 이어집니다>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 혜화문~낙산~흥인지문~광희문 3.2㎞ "낙산~흥인지문 구간은 산책·낙조·야경 명소"

혜화문은 한양도성에서 4소문(小門)의 하나였지만, 4대문(大門)의 하나였던 숙정문이 풍수지리적 이유로 평생 폐쇄됨에 따라 ‘북대문’의 역할을 했다. 이 문을 통해 미아리고개를 넘어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로 사람들이 오가고 물자가 운반되었다.

본래의 혜화문은 일제강점기 때 도로 확장을 이유로 철거되어 542년 만에 사라졌고, 현재의 혜화문은 당초 위치에서 13m 떨어진 지점의 언덕 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이왕이면 도성 형태의 구름다리를 만들어 건너편 낙산 언덕으로 도성길을 이어주었으면 한다.

혜화문의 어제와 오늘. <위> 예전의 혜화문과 가옥들 <아래> 현재의 혜화문은 당초 위치에서 북쪽으로 13m 떨어진 언덕 위에 새로 지은 것이다.

혜화문 옹벽을 내려와 횡단보도를 건너 계단을 오르면 낙산 구간이 시작된다. 끊어졌다 나타났다 했던 혜화동 구간과 달리, 여기서 흥인지문까지는 제대로 된 성곽이 끊김없이 이어진다. 성은 하나지만 돌은 여러 가지다. 시대에 따라 사용한 돌의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다르고, 보수한 흔적도 많다. 맨 위에 있던 돌들을 누가 다 가져갔는지 성곽의 지붕은 대부분 최근에 쌓아 색이 하얗다.

유심히 보면 글이 새겨진 돌들이 있는데, 이를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한다. 구간마다 성을 쌓은 사람들의 출신 고장이나 석공의 이름을 새겨, 그곳이 무너지면 다시 불러 쌓게 했다. 처음부터 잘 쌓으라고 책임감을 준 공사실명제인 셈이다.

한양도성에 새겨진 시간. 성을 쌓고 보수한 시대별로 돌의 모양, 크기, 색깔이 제각각이다.
각자성석(刻字城石). <위 왼쪽> 성을 쌓은 사람들의 출신 고장 <위 오른쪽> 개축 일자 <아래> 구간별로 공사를 지휘한 석공의 이름.

낙산(124m)은 본래 타락산(駞駱山)이라 했다. 낙타의 등처럼 볼록한 산이라는 뜻인데, 산이라기보다는 언덕이다. 언덕을 지나며 내려다보는 369마을, 장수마을, 이화마을, 창신동은 무허가 판잣집과 시멘트집들이 많던 달동네였다. 지금도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고 미로 같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나있다. 도성길에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길 옆에는 하나둘 예쁜 카페들이 들어서서 이제는 제법 카페거리 풍경이 되고 있다. 특히 시내를 전망하는 발코니를 붙인 카페들 인기가 좋다. 카페와 낙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시내 야경은 일품이다.

낙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노을. 안산 너머로 떨어지는 낙조가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낙산에서 동대문으로 내려가며 바라보면, 성 안쪽으로는 뾰족뾰족한 빌딩 숲이 번쩍거리고, 성 바깥쪽으로는 구릉에 계단식으로 난립된 주택들이 빽빽하다. 조선시대에 성 바깥의 사람들은 함부로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하니 그런 차이가 현재까지 대물림되고 있는 듯하다.

성 바깥의 감나무 한 그루에 새들이 모여 한참 식사 중이다. 카메라를 조준하니 참새들은 화들짝 놀라 도망가고, 직박구리 한 마리는 기자를 한번 쳐다보더니 “뭐 이런 거를 찍느냐?”며 식사에 집중한다. 사람과 달리, 새들은 성 바깥이 유토피아일 것이다.

한양도성의 직박구리. 성 바깥 주택의 감나무에서 식사 중인데, 카메라를 들이대도 도망가지 않는다.

동대문! 하면 시끄럽고 복잡한 도시환경이 연상되었는데, 이화여대병원이 이전하면서 주변이 공원화되고, 도성길이 정비되면서 면모가 달라졌다. 병원이 도시를 치료하고 이전한 격이다. 동대문의 정식 이름은 흥인지문이다. 원래 흥인문(興仁門)이었는데, 이곳의 지대가 낮아 기운을 돋구기 위해 용처럼 생긴 ‘之(지)’자를 넣어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바꾸었다. 남대문과 쌍벽을 이루었던 보물1호 동대문인데, 국보1호 남대문이 소실되어, 이제 동대문이 그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한 문이 되었다. 따라서 국보와 보물의 격을 바꿔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흥인지문공원의 언덕. 잠깐 동안의 발품으로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왼쪽은 한양도성박물관이 있는 건물.
흥인지문공원 언덕에서 내려다 본 한양도성과 흥인지문 일원의 야경. 새로운 도시 명소가 되고 있다.

흥인지문에서 광희문까지 약 900m는 도성이 완전히 없어진 곳이다. 아무리 도시개발을 마구 하더라도 거대한 구조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가? 이 의문에 답을 준 것이 이간수문(二間水門)이다. 청계천의 물을 도성 밖으로 흘려보내던 2칸의 수문인데, 일제강점기 때 운동장을 조성하면서 파묻었던 것을, 2008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할 때 밖으로 드러났다. 지대가 낮았던 이곳에 수문과 도성의 기초가 매몰되어 있었다.

이간수문. 600년 전에 시공한 수문이 일제강점기에 매몰되어 잊혀졌다가, 동대문운동장 철거 때 발견되어 83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수문과 연결된 도성의 기초 흔적이 광희문 방향으로 나있다. 오른쪽 은빛 건축물은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왼쪽에 동대문운동장을 기념하는 조명탑.

이간수문에서 성곽이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을 따라가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끝에서 도로와 학교가 앞을 가로막아 직진할 수가 없다. 도로를 우회해서 횡단보도 2개를 건너면 거기에 광희문이 외롭게 서 있다.

◇ 광희문~남산~숭례문~돈의문 6.8㎞ "슬픈 광희문, 외국인이 더 많은 핫플레이스 남산, 조선-근대-현대가 함께 있는 도성길의 끝 정동"

광희문(光熙門)은 빛을 밝힌다는 좋은 뜻이지만, 시신이 나가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屍口門)으로 불렸다. 성 바깥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죽은 자를 위로하는 무속인들이 많아 이곳을 신당리(神堂里)라 불렀다. 오늘날 떡볶이로 유명한 신당동(新堂洞)이다.

일반 백성과 시체만 출입하는 문이었으나, 경황이 없어 이 문을 지나간 왕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인조다. 병자호란 때 이 성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도피했으니, 그는 이미 시체와 같은 처지로 굴욕을 겪은 셈이다.

그런 비운의 스토리가 있어서일까, 광희문은 초라하고 남루해 보인다. 성문에서 한 쪽만 100m 쯤의 성벽이 붙어있고, 도로 쪽은 성벽이 1㎝도 없어 불구자처럼 보인다. 성문과 성벽의 색도 달라서 다른 시대의 것을 억지로 붙여놓은 듯하다.

광희문-장충동 구간의 불쌍한 도성. <위> 광희문. 초라하고 우중충해 보인다. 성문과 성벽의 색깔이 달라 억지로 붙여놓은 표시가 난다. <아래> 광희문에서 장충동으로 가는 길에 주택의 석축으로 사용된 도성 일부의 흔적.

광희문에서 장충체육관까지 약 800m 구간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주택을 조성하면서 도성을 다 허물었다. 도성이 있었던 길을 따라가다 보니, 허름한 주택의 틈바구니에서 축대로 사용된 돌들이 몇 군데 남아있고, 도성 위에 축조된 큰 저택은 담이 높아 아예 들여다볼 수가 없다. 일일이 조사해서 ‘조선의 돌’을 회수해야 하지 않을까?

불쌍한 도성은 8차선 도로를 넘어선 장충체육관 뒷길에서 다시 나타난다.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갖추어 남산자락을 향해 올라가는 도성길에 산책객과 반려견이 많다. 예전에는 사람이 개를 끌고 다녔는데, 이제는 개가 사람을 끌고 다닌다는 표현이 더 맞다. 견공이 서는 곳에 사람도 선다. 도성이 산등성이 끝에 이르자 서울의 북쪽과 동쪽 시내, 그 너머의 외곽에 펼쳐진 산줄기 조망이 그만이다.

다산동 성곽에서 본 서울,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 오른쪽은 신라호텔.

잘 나가던 도성은 다산팔각정에서 다시 끊기고, 도성 자리에 들어선 반얀트리 호텔 부지를 밞고 장충단로 도로를 건너는 기분이 복잡하다. 이 구간은 일본인이 아니라 우리 손으로 도성을 훼손한 구간이다. 국립극장의 왼쪽으로 난 도로를 조금 올라가면 남산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오고, 여기서 도성과 반가운 재회를 한다.

이곳의 도성은 시대별로 다양한 돌을 사용해 다양한 방식의 돌쌓기를 했고, 각자성석도 많아 도성을 공부하기에 좋은 곳이다. 지형이 험해서 그만큼 도성이 잘 보존되었다. 655개의 가파른 계단을 다 올라서면 거기에 좌우로 180도의 광활한 서울을 조망하는 전망대가 나온다. 도성과 헤어져, 부드러운 산책로를 좀 오르면 아스팔트 길에서 다시 도성을 만나 남산 정상으로 올라간다.

655계단. 가파른 성벽을 따라 숨차게 오르면, 서울시의 절반이 보이는 전망대에 닿는다.

남산(271m)의 본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이다. 목멱의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마뫼(앞산)’라는 우리말을 한자로 ‘木覓(목멱)’으로 썼다는 설이 가장 많다. 즉, 목멱산은 한양의 중심인 백악산과 경복궁의 앞산이라는 뜻이다.

남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한양도성 순성길에서 최고의 풍경이다.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도봉산-수락산이 북쪽의 찬 기운을 막아선 가운데, 안쪽의 인왕산-백악산-낙산으로 이어진 한양도성이 둥그렇게 시내 중심을 감싸고, 그 안에 고층빌딩과 낮은 건물들이 빼곡하다. 대자연 속에 하얀 도시가 얌전하게 담긴 풍경이다. 해 질 무렵인 이 시간에 내국인보다 외국인이 훨씬 많다. 한눈에 바라보이는 서울, 특히 야경이 멋져서 남산 정상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핫플레이스가 되고 있다.

남산에서 바라보는 서울 뷰. 여기서 바라본 서울은 아무 일도 없을 듯한 평화도시다. 서울을 품은 한양도성(인왕산-백악산-낙산) 줄기를 북한산과 도봉산이 품고 있는 풍경.
서울의 석양. 백범광장으로 내려서며 잠두봉(蠶頭峯)전망대에서 바라본 노을. 가운데 안산, 오른쪽으로 인왕산과 북한산.

도성은 남산 서쪽 계단의 담장이 되어 길게 내려가다가, 백범광장이 가까이 바라보이는 지점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의 신궁(神宮)을 짓고 참배로를 만들면서 ‘우리의’ 도성을 허물었다. 조선 민족의 자존심도 허물어졌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스스로 신궁을 해체한 자리에 남산식물원과 분수대가 들어섰고, 이후 이들을 철거하는 과정에 한양도성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야외전시관에서 공개되고 있는 현장을 보면 마치 수천 년 전의 땅속 유물을 보는 듯하다.

남산과 한양도성의 밤. 하얀 도성 위로 파란 하늘이 처연하고, 그 위에 뜬 노란 달이 남산과 서울을 따듯하게 비추고 있다.

일제의 신궁이 있던 자리에, 일제에 항거했던 안중근, 김구, 이시영 선생의 동상이 이어진 광장을 내려서면, 도성을 재현시킨 형태로 쌓은 ‘현대식’ 성곽이 나타난다. 하얀 성곽을 터벅터벅 내려서면 남산 순환도로에서 성은 끊기고, 도로 건너에서 낮은 담장으로 잠깐 나타났다가 퇴계로를 건너는 남산육교에서 완전히 끊긴다. 남산육교를 건너며 바라보는 서울역과 남대문에서 1980년 5월의 어느날을 추억한다. 함성과 최류탄 가스가 가득했던 그때만 해도 이곳이 한양도성 자리였다는 것을 누구도 의식하지 못헀다. 그 길의 끝에 숭례문이 덩그러니 앉아있다.

파리에 개선문이 있다면 서울엔 남대문이 있다! 이렇게 말했던 남대문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불에 탔으니, 그날 문루가 주저앉는 모습을 지켜본 국민의 가슴에 멍이 들었다. 남대문의 본명은 ‘예를 높인다’는 뜻을 가진 숭례문(崇禮門)이다. 한양의 정문이었으니 조선의 정문이었다. 그런데 1907년 이곳에 온 일본의 황태자가 ‘조선의 정문’ 밑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양쪽 성벽을 허물고 길을 냈다니, ‘숭례’에서 벗어난 문화의식이 아닐 수 없다. 이후부터 숭례문은 양팔이 잘린 채 몸통만 남은 상태에서 100년을 견디다가 불에 탔고, 이후 문루를 복원하면서 성벽 일부를 복원했다.

남대문의 낮과 밤. 남대문 앞에 화기(火氣)를 누르는 연못인 남지(南池)가 있었으나 1907년 일제에 의해 매몰되었다. 이 연못이 살아 있었다면 화재를 막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이정표 없이 남대문에서 서대문으로 가는 1.4㎞의 한양도성길을 찾으라고 하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다. 서울의 도심인 이곳에서 도성은 완전히 사라졌고, 남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옆길에만 짧은 돌담 형태로 재현되어 있다. 빌딩에 속한 담장처럼 보인다. 그런 흔적을 지나 쭉 걸으면 서소문로와 부딪히고, 거기에 ‘소의문 터’라는 작은 표지판이 서 있다. 흔히 서소문으로 불렀던 이 문의 바깥에 사형집행장이 있었고, 여기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했다. 서소문 역사공원에 그런 역사가 담긴 박물관이 있다.

도로를 한참 우회해서 정동에 들어선다. 도성은 러시아대사관과 창덕여중 방향으로 흔적이 있는데, 그리 가는 길은 없어 정동길로 돌아서 돈의문으로 가야 한다. 정동은 조선의 도시가 아니라 대한제국의 도시다. 덕수궁 돌담길 끄트머리에서 나타나는 근대도시 건물들이 이색적이고, 그 바깥으로 현대도시의 빌딩들이 쑥쑥 올라가 있다. 빨간 벽돌의 근대건축물들과 오래된 가로수들이 어울린 풍경이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풍경에는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던 격동의 역사가 서려 있다. 정동공원 언덕에서 조선의 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1년이나 머무른 현장을 바라보니 가슴이 먹먹하다.

조선시대-근대-현대가 함께 있는 길 끝의 정동사거리에 이른다. 서대문으로 불렀던 돈의문이 있던 자리다. 한양도성을 한 바퀴 다 돌았다.

정동의 근대건축물 <위 왼쪽> 정동교회. <위 오른쪽> 중명전(重明殿). 이곳에서 치욕의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래서 을사년스럽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나왔다. 건물도 우울해 보인다. <아래> 궁궐담장-근대건축물-현대건축물이 함께 있는 풍경.

이틀에 걸쳐 18.6㎞를 돌았는데, 마치 186㎞를 돌아서 온 것처럼 많은 것을 보고, 많은 느낌을 받았다. 인왕산에서 기운차게 올라갔던 한양도성이 중간에 끊겼다가, 이어졌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새로 들어섰다가 하면서 600년을 이어온 모습에서 우리 역사의 끈질긴 생명력을 본다.

한양도성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면, 수많은 전쟁과 격렬한 도시화 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았지만, 이를 크게 슬퍼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를 허물고 들어선 도시에 대해서도, 자기 돌을 가져다가 지은 집들에 대해서도 그들의 안녕을 바랄 것이다.

한양은 아시아의 동쪽 작은 나라의 이름 없는 도읍이었지만, 서울은 이제 세계의 중심 중 하나일 정도로 성공한 도시가 되었다. 서울의 한양도성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어 세계인들이 한 번쯤 걷고 싶어 하는 명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도성 주변에서 고생했던 후손들이 조상 덕을 좀 보기 바란다.

stone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