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석레인저가떴다] 북두칠성 이은 듯 3사 4암…소박하게 내려앉은 '佛心'

지리산④ 칠암자 길…다소곳이 포근한 도솔암~실상사 13㎞
영원사 복주머니란, 문수암 얼굴바위, 실상사 돌장승…산속 '선물'

지리산 칠암자 길의 삼불사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산과 구름이 섞이고, 그 아래 임천강이 유유하게 흐르고 있다 ⓒ 뉴스1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부처님 오신 날 즈음에 의미있는 산행으로 지리산 칠암자길을 소개한다. 이 길은 지리산 마루금에서 북쪽으로 갈라진 삼정산 자락의 산허리에 점점이 박혀있는 일곱 개 절을 잇는 산길이다. 사찰과 암자로 엄격하게 따지면 3사(寺)4암(庵)이지만, 깊은 산에 숨은 듯한 고즈넉한 분위기를 따라 칠암자라 부른다.

ⓒ 뉴스1 김초희 디자이너

도솔암은 부처님 오신 날에만 길을 개방하므로 평소에는 육암자 길이다. 함양군 양정마을에서 시작하는 육암자 길은 약 11㎞, 음정마을에서 시작하는 칠암자 길은 약 13㎞다. 산행 초입의 오르막을 제외하곤 대체로 해발 1200m에서 300m까지 내리막 길이다. 일부 산꾼들이 멋대로 다니는 샛길을 잘못 따라가다 길을 잃기 쉬우므로 반드시 정해진 탐방로로 다녀야 한다. 길을 이은 모습이 마치 북두칠성과도 같은 일곱 개 절은 각각 풍경과 느낌이 다르다.

해발 1,200m에 자리한 도솔암의 단아한 모습. 입구에 “스님들의 기도터이니, 출입을 삼가하시오”라는 안내문이 있다 ⓒ 뉴스1

도솔암을 가기 위해서는 벽소령으로 가는 비포장길을 가다가 오른쪽 샛길의 된비알을 한참 올라야 한다. 부처님 오신 날에만 개방하는 길이므로 암자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없어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이 많다. 나홀로 산행을 해서는 절대 안되는 곳이다.

도솔(兜率)은 불교에서 이상세계를 일컫는다. 그 이름뜻대로 도솔암은 해발 1200m의 멀고 먼 산꼭대기에서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 마루금이 훤히 바라보이는 이상적인 장소에 자리하고 있다. 분명히 높이 솟은 전망터인데 아늑하게 둘러싸인 지세가 오묘하다. 절집은 소박하고, 연두빛 잔디밭에 서 있는 하얀 석탑이 단정하다. 마당 끝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면 누구나 가슴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절간 뒤편의 기다란 ‘나무 물그릇’에 철철 넘치는 약수를 한사발 들이키니 차가운 기운이 실핏줄까지 전해져, 그런 청량한 기분으로 절을 내려 선다.

영원사1. 1938년, 대궐 같은 절에 흰옷 입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 뉴스1
영원사2. 1948년 불태워 진 후 현재의 모습 ⓒ 뉴스1

도솔암에서 한시간 쯤 오솔길을 내려와 영원사(靈源寺)에 다다른다. ‘영혼의 근본을 찾아서’라는 절 이름이 엄숙하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이름 높은 고승들이 수행했던 절 앞뜰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골격이 우람하다. 지리산에 묻혀 있는 절이 아니라, 절이 지리산을 펼쳐 앞산으로 삼은 듯하다. 주지스님 방에 걸린, 1948년 여순사건 때 불태워지기 전의 흑백사진에 들어있는 영원사는 지금보다 10배나 더 큰 사찰이었다.

영원사 뒤뜰에는 지리산에서 멸종위기에 있는 복주머니란이 자생하고 있다. 과거에는 풍성한 군락을 이루고 있었지만 이제는 불과 수십 촉이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국립공원사무소에서 보호시설과 감시카메라를 설치해 애지중지 보살피고 있지만, 사람 손을 타지 않을지 불안불안하다. 영원사도, 복주머니란도 영원했으면 좋겠다.

영원사 복주머니란. 개불알꽃이라고도 한다. 절대 보존해야 할 멸종위기종이다. 사진 지리산국립공원사무소 ⓒ 뉴스1

영원사에서 800m 가파른 등산로를 낑낑 오르면 빗기재 정상이고, 여기서 오솔길 수준의 1㎞를 가면 상무주암이다. 등산로 곳곳에 소나무 고목과 어우러진 지리산 전망터가 있어 쉬엄쉬엄 간다. 상무주암은 산 바깥을 도는 오솔길 안쪽에 슬며시 앉아 있다. 작은 절집과 좁은 길, 급한 비탈에 일군 작은 채소밭이 서로 기대어 있다.

상무주(上無住)란 ‘지극히 깊은 깨달음’이란 뜻으로, 여기서 40년 가까이 머물고 계신 스님의 풍모에서 도인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법당 마루에 앉아 돌담 너머 저멀리 지리산과 구름이 뒤섞이는 풍경을 바라본다. 이 그림을 매일 본다면 나도 도가 트이지 않을까? 암자를 나와 길 모퉁이의 널다란 소나무 바위에서 수묵화같은 지리산을 한번 더 알현하고 길을 간다.

상무주암에서 문수암(文殊庵)까지 1㎞는 쉽게 내려서지만, 군데군데 경사가 급하고 물기가 많은 곳이 있어 미끄럼을 조심해야 한다. 적막하고 어두운 숲속길이 답답하다 싶을 즈음, 갑자기 터억! 나타나는 ‘쪼끄만’ 암자와 탁 트인 전망에 와~! 하며 내려선다. 큰 바위 아래에 축대를 쌓아 만든 좁다란 땅에 살짝 들어선 법당이다. 절이라기 보단 외가집 사랑채같이 정겹다. 몇 년 전까지 계셨던 노스님도 외가집 할아버지같이 자상한 분이셨다.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스런 허름한 나무의자에 앉아 가까이 우람한 산자락과 멀리 첩첩한 산체와 그 위에 빨리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니, 지리산 입체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이 굉장한 풍경을 공짜로 보고, 이리 마음이 두근거리니, 돈 한푼 안드는 신선놀음이다. 큰 바위굴에서 나오는 물 한 모금으로 몸 안을 식히고, 물 한 바가지로 몸 밖을 식힌 후, 암자를 내려선다.

문수암 풍경. 사진의 녹색지붕 절집은 무너져 철거되었고, 왼쪽 끝 바위 밑의 법당만 남아있다. 지리산 건너 삼봉산이 아득하다 ⓒ 뉴스1
문수암 얼굴바위 ⓒ 뉴스1

다시 1㎞, 골목길 같은 산길을 내려서면 산자락의 허리에 자리한 삼불사(三佛寺)다. 문수암과 비교하면 터가 넓고, 여러 건물들이 있어 상대적으로 ‘있어 보이는’ 절이다. 살림집 같이 평범하게 생긴 법당 앞에 앉으니, 왼쪽으로 지리산 바깥 산들과 마을이, 오른쪽으로 멀리 천왕봉에서 하봉-추성리로 흘러내리는 능선의 실루엣이 부드럽다. 여기서 보면 슬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 가보면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되는 험로다. 저 아래엔 마을과 강과 도로가 아른거리고, 앞산은 새잎들의 파스텔 톤 연녹색이며, 먼 산은 푸르스름하고, 산 사이사이로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있다. 칠암자 코스에서 풍경시합을 한다면 1, 2등을 다툴 그림이다.

삼불사에서 약수암까지 2.4㎞는 심심한 오솔길 끝에 널직한 산길이 나오고, 내려갈수록 동네 뒷동산 풍경이다. 이리저리 에둘러가는 길이 지루할 즈음 약수암에 도착한다. 절의 물이 얼마나 맛있으면 약수암(藥水庵)일까? 두 개의 돌확(水盤)에 담겨 흐르는 물 한 모금 넘겨보고 고개를 갸우뚱 해본다. 산 꼭대기에서 맛본 ‘차가운’ 약수물과 비교되는 것인가? 밍밍한 느낌이다.

돌계단 위 보광전(普光殿)에 부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조각한 목각(목조탱화)이 있다. 11분의 옷자락 주름까지 세밀하게 조각하고 금칠을 한 기교와 정성이 놀랍다. 노란색 절집의 반질반질한 마루에 엉덩이 붙이고, 몸은 벽에 기대고, 햇빛 부서지는 마당 끝 채소밭을 내려다 본다. 길을 재촉해야 하는데, 코 끝에 바람이 일며 살살 졸립다.

실상사. 가운데 멀리 천왕봉이 보인다 ⓒ 뉴스1

약수암에서 나와 편안한 산책로와 불편한 콘크리트 임도를 걷다가, 논밭과 어우러진 실상사(實相寺)에 이른다.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實相)은 곧 자연(自然) 아닌가? 지리산에 가장 어울리는 절 이름이다. 산에 있는 다른 절과 달리, 실상사는 낮은 땅에 낮게 엎드린 자세다. 높지만 낮게 보이는 지리산의 자세와도 같다.

이 절에서 색다른 전각은 약사전(藥師殿)이다. 예쁜 꽃살문에 눈요기하고, 육중한 철(鐵)불상에게 합장하고, 그 뒤에 이호신 화백이 그린 ‘지리산 생명평화의 춤’ 탱화를 구석구석 들여다 본다. 현대화와 동양화가 융합된 칼라풀한 그림에 지리산의 자연과 역사와 사람들의 삶이 들어 있다.

절터에 풍수지리적인 기운이 있어,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설이 있었다. 그래서 약사전 불상이 천왕봉 너머로 일본의 후지산을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절 마당에서 상봉(천왕봉)-중봉-하봉의 실루엣을 바라보며 지리산의 기운을 느껴본다. 절을 나와 속세와 경계를 이루는 개울을 건너기 전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돌장승이 큰 눈으로 나를 꿰뚫어 본다. 나는 잡귀가 아니야! 하고 얼른 세속으로 나아가며 13㎞에 7시간쯤 걸린 순례길을 마무리한다.

실상사 입구 돌장승. ‘벅수’라고도 한다. 큰 눈에 주먹코가 익살스럽고 친근하다 ⓒ 뉴스1

이처럼 칠암자 길은 지리산 안에서 지리산을 보며 걷는 길이다. 외로운 산길에 문득문득 나타나는 암자와 낙락장송과 바위와 야생화를 보며 경외심을 느끼는 사색의 길이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안개가 짙고 어두워도, 생명·평화의 지리산 풍경을 가슴으로 보며 걷는 명상의 길이다.

그러니 떠들썩한 단체산행이 아니라 서너명이 온 듯 안온 듯 스치되, 울림과 여운이 남는 수행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지리산과 부처님이 내 준 길을 즐기되, 절 안쪽은 스님들의 조용한 기도처로, 길 바깥은 야생동식물들의 안전한 보금자리로 배려하는 공존의 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리산 도마마을과 군자마을의 봄. 사진 오른쪽 위 첩첩한 능선에 5개 암자가 있고, 산 아래 뒤편에 약수암과 실상사가 있다. 그림 이호신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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