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교황청 궁전에 내린 한강의 눈…두 언어로 읽은 ‘새’
이혜영·이자벨 위페르, 한국어·프랑스어로 ‘작별하지 않는다’ 낭독
공연 말미 한강 직접 등장…객석 박수에 다시 무대 앞으로
- 이준성 특파원
(아비뇽=뉴스1) 이준성 특파원 = 한여름 밤,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궁전 명예의 뜰에 눈이 내렸다. 실제 눈은 아니었다. 흰 무대, 중세 궁전 벽면의 창 하나에만 비친 눈발, 그리고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읽힌 한강의 문장이 그곳을 겨울의 제주로 옮겨놓았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바탕으로 한 낭독 공연 '새'(Oiseau)가 15일(현지시간) 밤 10시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궁전(Palais des Papes) 명예의 뜰(Cour d'honneur)에서 열렸다. 제80회 아비뇽 페스티벌이 올해 한국어를 초청 언어로 선정한 가운데, 프랑스 연출가 줄리 델리케가 소설 1장 '새'를 중심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공연은 배우 이혜영과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의 낭독으로 진행됐다. 이혜영이 한국어로 읽을 때는 프랑스어와 영어 자막이, 위페르가 프랑스어로 읽을 때는 한국어와 영어 자막이 교황청 궁전 벽면에 비쳤다. 자막은 배우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투사돼 앞쪽 객석에서는 낭독하는 배우와 자막을 한눈에 따라가기 쉽지 않았다.
무대 위 설치물은 많지 않았다. 새하얀 바닥과 흰 옷을 입은 두 배우, 그리고 조명이 전부에 가까웠다. 대신 교황청 궁전의 거대한 돌벽이 무대 뒤편을 채웠다. 벽면의 여러 창 가운데 한쪽 창에만 눈 내리는 효과가 비쳤고, 흰 무대는 어둠에 잠긴 객석과 대비됐다. 이 단순한 구성은 소설 첫 장의 눈보라와 고립감을 떠올리게 했다.
'새'는 경하가 친구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 중산간의 집으로 향하는 소설의 앞부분을 따라간다. 눈보라를 뚫고 새를 구하러 가는 여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제주 4·3의 기억과 가족사, 그리고 죽은 이들을 잊지 않고 애도를 끝내지 않겠다는 마음이 겹쳐 있다. 공연은 두 배우의 낭독과 벽면 자막, 흰 무대를 통해 소설 첫 장의 문장을 차분히 따라갔다.
공연 말미에는 한강이 직접 무대에 등장했다. 궁전 벽면에는 ‘한강’이라는 이름이 비쳤다. 한강은 제주와 한국전쟁 초기 민간인 학살의 기억을 잇는 소설 속 대목을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그가 읽은 대목에는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라는 문장이 포함됐다. 객석은 조용히 그의 낭독을 들었다.
전날의 찜통더위보다는 한결 산뜻한 바람이 불었지만, 긴 낭독 공연을 야외 객석에서 따라가는 일은 적지 않은 집중을 요구했다. 공연 중반을 지나며 일부 관객이 조용히 자리를 뜨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대는 끝까지 두 배우의 낭독과 벽면 자막, 흰 무대의 이미지에 집중했고, 과한 움직임 없이 소설 첫 장의 정서를 이어갔다.
자정 가까운 시간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는 박수가 이어졌다. 한강과 위페르, 이혜영이 무대 인사를 마치고 퇴장한 뒤에도 박수가 잦아들지 않자 세 사람은 다시 무대 앞으로 나와 5분 가까이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교황청 궁전 밖도 한동안 쉽게 비워지지 않았다. 늦은 밤 귀가를 서두르는 관객들, 삼삼오오 모여 공연의 여운을 나누는 사람들, 한강과 위페르, 이혜영을 가까이서 보려는 팬들이 뒤섞였다. 궁전 앞은 자정이 넘은 뒤에도 붐볐다.
홀로 공연장을 찾은 백발의 프랑스 관객 엘리자베스 티에는 “정말 훌륭한 공연이었다”며 “원작 소설을 읽어서 알고 있는데, 책에는 폭력 때문에 읽기 훨씬 힘든 장면들이 있다. 그런데 이번 공연은 정말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마지막에 한강의 글을 낭독하는 장면이 좋았다”며 “한국어로 진행된 부분도 듣기 좋았다. 번역과 함께 다른 언어를 실제로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고 했다.
한강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는 프랑스 관객 루시아 리오는 “한강이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공연에 대해서만 조금 찾아보고 왔다”며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게 돼 좋았다”고 말했다.
'새'는 한강의 소설을 줄거리 중심으로 무대화한 작품이라기보다, 문장 자체가 다른 언어와 배우의 몸을 통과할 때 어떻게 다시 들리는지를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이야기 전체를 압축하는 대신 한 장의 감각을 붙들었고, 배우의 목소리와 몸, 돌벽과 자막, 밤공기와 흰 무대가 그 문장들을 다시 통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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