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요, 조금만 더"…산사태처럼 밀려오는 여운, 연극 '키리에' [리뷰]

국립정동극장 세실, 4월 15일까지

'키리에' 공연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서울=뉴스1) 정수영 기자 = 어떤 연극은 몇몇 장면이 유독 선명하게 각인된다. 반면 어떤 작품은 막이 내린 뒤에야 비로소 여운이 산사태처럼 밀려온다.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공연 중인 연극 '키리에'는 후자다. 이야기가 전개되며 차곡차곡 쌓인 감정은 점차 부피를 키우다, 마지막에 이르러 눈덩이처럼 관객을 덮쳐 온다.

작품 제목은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뜻의 '키리에 엘레이손'(Kyrie Eleison)에서 따왔다. 가톨릭과 성공회 미사에서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기도로 쓰이는 말인데, 이 작품에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오가는 깊은 사랑의 의미로 확장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은 독일 '검은 숲' 인근에 자리한 집이다. 이 집은 젊은 한국인 여성 건축가(최희진 분)가 설계했지만, 그는 과로로 세상을 떠났고 그 영혼이 집에 깃든다. 그러던 어느 봄날, 25년간 아무도 찾지 않던 이곳에 '엠마'(유은숙 분)가 병든 남편과 함께 들어온다. 엠마는 이 집을 여관처럼 꾸려 낯선 이들을 맞이한다.

이후 추리 소설가 '관수'(백성철 분), 교직원 '목련'(조어진 분), 성직자 '분재'(윤경 분)가 차례로 이 집을 찾는다. 가슴 시린 이별과 반복된 학대, 지독한 자기혐오를 겪으며 삶의 끝자락에 내몰린 이들이다. 생을 마감하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머문 곳이 바로 '엠마네 여관'이다.

이 집에 묵는 동안 이들의 마음에는 서서히 볕이 스며든다. 서로의 악몽 같은 과거에 귀 기울이고 조심스레 공감하는 사이, 다시 살아보고 싶은 희망이 싹튼다.

'키리에' 공연사진(국립정동극장 제공)

특히 엠마의 존재가 크다. 버섯 초콜릿을 만들고, 보리차를 끓이며,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정성 어린 음식을 내어놓는다. 그 따뜻함 앞에서 관수는 엠마에게 "작은 사랑이라도 받으면 제가 약해지네요, 마음이 이상하네요, 약간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라고 털어놓는다. 세 투숙객은 결국 계획을 바꾼다. 죽음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삶의 방향으로 되돌리기로.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다. 건축가의 영혼이 "엠마, 살아요,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요, 조금만 더 힘내요"라고 외칠 때, 그 말은 무대 밖 관객 각자에게 건네는 격려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절망에 잠긴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고 싶다는 마음을 뜨겁게 불러일으킨다.

"좋은 소설책 한 권을 읽은 느낌"이라는 온라인 후기가 여럿 눈에 띈다. 그만큼 문학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다만 문어체에 가까운 대사와 상징적인 표현은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곱씹게 만드는 대사들이 적지 않다.

대본을 쓴 장영 작가는 "사실은 살고 싶어 하고, 사실은 살리고 싶어 하는 우리의 마음을 잠시나마 붙잡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키리에'는 오는 4월 15일까지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공연된다.

js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