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아베베, 로마 올림픽 마라톤 우승 [김정한의 역사&오늘]

1960년 9월 10일

제17회 로마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1위로 결승점으로 들어오는 아베베 비킬라 (출처: Unknow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60년 9월 10일 저녁, 제17회 로마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한 선수가 전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신발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자갈길과 아스팔트를 박차고 달리는 검은 대륙의 무명 건각,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였다.

대회 직전 공식 후원사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 물집이 잡히자 아베베는 맨발 출전을 결심했다. 조국 고향의 거친 흙길을 달리며 단련된 발바닥을 믿은 과감한 선택이었다. 경쟁자들과 전문가들은 미개한 기행이라며 조소를 보냈다. 그러나 아베베는 선두권에서 놀라운 리듬을 유지하며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결승선을 1.5km 남겨둔 지점, 과거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뒤 전리품으로 약탈해 로마 시내에 세워두었던 '악숨의 오벨리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대한 석탑 앞을 지나는 순간, 아베베는 폭발적인 스퍼트를 감행했다. 역사의 모순을 비웃듯 그는 경쟁자 압데살람을 완전히 따돌리고 어둠 속으로 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아베베는 2시간 15분 16초 2라는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며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아래 결승선을 1위로 통과했다. 흑인 아프리카 국적 선수로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맨발로 로마의 돌길 42.195km를 완주하고도 숨조차 거칠지 않았던 철인의 등장이었다.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내 조국 에티오피아가 언제나 단호함과 영웅적인 기백으로 승리해 왔음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담담히 소회를 밝혔다. 침략국 이탈리아의 심장부에서, 그것도 빼앗긴 고국의 유적을 지나며 일궈낸 승리는 단순한 스포츠 메달 이상의 무게를 지녔다.

아베베의 맨발 질주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자긍심을 일깨웠으며, 마라톤 역사상 가장 강렬한 상징으로 남았다. 4년 뒤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맹장수술을 받은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신발을 신고 출전해 사상 첫 올림픽 2연패를 달성, 맨발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