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日에 선전포고…美 원폭에 이은 치명타 [김정한의 역사&오늘]
1945년 8월 8일
- 김정한 기자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45년 8월 8일 오후 5시,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 사토 나오타케는 크렘린궁으로 급히 호출됐다. 몰로토프 소련 외무상이 그에게 건넨 문서에는 냉혹한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 "내일인 8월 9일부터 소련은 일본과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
소련의 전격적인 대일 선전포고는 얄타 회담의 밀약에 따른 수순이었다.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한 뒤 3개월 이내에 붉은 군대를 극동으로 이동시키겠다고 루즈벨트, 처칠과 합의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불과 이틀 뒤, 소련은 얄타 약속의 시한을 정확히 맞춰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향해 거대한 전쟁 머신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선전포고에 따라 약 15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 극동 전선군은 8월 9일 0시를 기해 만주 국경을 넘었다. 당황한 일본 관동군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풍전등화의 처지로 전락해 있었다. 정예 부대는 이미 태평양 전선으로 차출된 뒤였고, 남아있던 전력은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소련군의 압도적인 공세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다. 만주 작전은 그야말로 일방적인 맹공이었다.
원폭 투하라는 미증유의 비극에 더해진 소련의 참전은 도쿄 대본영에 치명타를 날렸다. 중립국 소련을 통한 강화 협상이라는 마지막 줄기마저 끊어지자, 전쟁 수행을 고집하던 일본 군부의 강경파도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 소련군의 파죽지세 같은 남하는 일제의 무조건 항복 결정을 대폭 앞당기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 선전포고는 한반도의 운명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소련군 제25군은 선전포고 직후 무주공산이 된 한반도 북부로 빠르게 진격해 웅기, 나진, 청진을 연이어 점령했다. 붉은 군대의 빠른 남하는 미국을 조바심 내게 만들었고, 결국 38도선을 경계로 한 분할 점령이라는 비극적인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침을 울린 촉매제이자, 동시에 동북아시아에 아픈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종식이라는 해방의 환희 뒤편에서, 한반도를 관통할 잔인한 분단의 비극은 그렇게 가속도를 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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