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관념론의 거장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출생 [김정한의 역사&오늘]

1762년 5월 19일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출처: Unknown autho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762년 5월 19일 루사티아 지방의 라메나우에서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가 태어났다. 독일 관념론의 전개 과정에서 이마누엘 칸트와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 철학자다.

가난한 리본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뛰어난 기억력 덕분에 지역 귀족의 후원을 받아 예나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피히테의 학문적 전환점은 칸트 철학과의 만남이었다. 칸트의 비판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1792년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라는 익명의 논문을 발표, 일약 학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의 가장 위대한 학문적 업적은 독창적인 철학 체계인 '지식학'의 정립이다. 칸트가 현상과 물자체를 분리한 것에 반기를 든 피히테는 물자체라는 개념을 과감히 제거했다. 그는 우주의 근원을 외부 세계가 아닌 인간의 능동적인 '자아'에서 찾았다.

피히테에 따르면, 자아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정립하는 활동성이다. 그는 자아가 스스로를 정립하고(정, 定), 이에 대립하는 '비자아'를 설정하며(반, 反), 최종적으로 자아 안에서 자아와 비자아를 통합하는(합, 合)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세계가 구성된다고 봤다. 이는 후대 헤겔 변증법의 모태가 됐다.

1794년 예나 대학 교수로 초빙된 그는 정력적인 집필과 강연을 이어갔으나, 1799년 무신론 논쟁에 휘말려 교수직을 사임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나폴레옹 군대가 베를린을 점령했던 1807년 겨울, 그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진행, 분열된 독일인들의 민족적 각성과 도덕적 쇄신을 촉구하며 실천적 지식인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1810년 창설된 베를린 대학의 초대 총장으로 선출돼 대학 개혁과 교육 제도 정비에 앞장섰다. 그는 인간의 주체성을 극대화한 철학자로서 오늘날까지 서양 현대 사상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