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급 무사 출신 이토 히로부미, 日 총리 취임 [김정한의 역사&오늘]

1885년 12월 22일

이토 히로부미 (출처: Unknown author, 1903,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85년 12월 22일, 이토 히로부미가 새롭게 도입된 내각제도의 수장, 즉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이토는 정통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조슈번의 하급 무사로서 요시다 쇼인의 쇼카손주쿠에서 수학하며 존왕양이를 외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영국 유학을 통해 서구 문명의 압도적인 실력을 목격한 후 개화파로 전향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의 공신들이 차례로 정계에서 물러나거나 사망한 뒤, 탁월한 정무 감각과 타협 능력을 바탕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이토의 총리 취임으로 일본 근대사의 거대한 전환점이 마련됐다. 이는 막부 체제의 잔재를 지우고 서구식 관료 국가로 나아가려는 메이지 정부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다.

이전까지의 일본의 관제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태정관에 권한이 집중돼 있었다. 또한 부처 간의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고 행정 효율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토는 독일(프로이센) 체제를 모델로 삼아 행정 각 부를 총리대신이 총괄하는 내각제를 설계했다. 이는 천황의 권위를 빌려 강력한 행정권을 행사하면서도, 문명국으로서의 외관을 갖추어 불평등 조약 개정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이토의 총리 취임과 함께 일본이 아시아 최초로 현대적인 행정 시스템을 갖춘 국가가 됐다. 그는 이후 헌법 제정을 주도하며 일본을 '입헌군주제'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하지만 그의 집권은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도 궤를 같이한다. 총리로서 다진 행정적 기반은 훗날 대외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기틀이 됐다. 특히 한국에서는 그는 침략의 원흉이자 원수로 기억된다.

이토의 총리 취임 날은 일본에는 문명 개화의 상징적인 날이었으나, 동아시아 주변국들에는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가 권력의 정점에 올라선 순간,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