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의 중대한 분기점이 된 베트남 파병 [역사&오늘]

1월 26일, 베트남 전투 병력 파견안 국회 가결

베트남 해안에 상륙하는 한국군. (출처: Unknown author(1966),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65년 1월 26일, 국회에서 베트남에 대한 전투병력 파병 결정안이 통과됐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베트남 전쟁이라는 또 다른 전쟁에 휘말리게 된 배경에는 냉전 시대의 국제 정세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 참전을 통해 국내 정치 기반을 강화하고 반대 세력을 억누르려는 목적도 있었다.

국내에선 공산주의 침략에 맞선 자유민주주의 수호,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안보 확보, 경제 성장의 기회의 명분과 인명 피해, 국민 경제 부담, 민주주의 훼손 등의 반대가 맞붙었다. 파병에 대한 찬반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결국 국회는 1964년 9월 파병을 결정했다. 이듬해인 1965년에는 전투 부대파병도 결정됐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약 9년 동안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으며,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규모는 최대 30만 명에 달했다. 한국군은 정글전, 매복 작전 등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다. 한국군은 정글전 등 험난한 전투 환경에서도 용맹하게 싸웠으며, 전투력은 미국 등 다른 참전국으로부터 높이 평가받았다.

베트남 전쟁 참전을 통해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미국의 지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의 군사력 강화와 안보 강화에 기여했으며, 이후 한국의 경제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산업화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많은 한국군 병사들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고엽제 후유증 등으로 고통을 받았다. 한국군의 전사자 수는 약 5100명에 달했고, 부상자 수도 1만 1200여 명을 기록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이용해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파병에 대한 찬반 논쟁은 국민을 분열시켰으며, 사회적 갈등도 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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