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엘라의 畵音] 뮤즈의 눈…모딜리아니와 쇼팽

모델리아니 '큰 모자를 쓴 잔'(1917년작)ⓒ 뉴스1

(서울=뉴스1) 노엘라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가 = 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들 한다. 눈을 통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눈동자는 참으로 많은 말을 한다. 사랑할 때는 더욱 더.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교감이 될 때가 있다. 그렇게 눈은 감정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 눈을 그리지 않은 화가가 있다. 바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884-1920)다.

모딜리아니는 수많은 인물화를 그렸는데 많은 작품에서 눈동자를 그리지 않았다. 우수에 찬 여인들의 그림들. 텅 빈 눈동자. 눈에선 공허함이 느껴진다.

1884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는 어려서부터 결핵, 폐렴, 늑막염 등을 앓았다. 몸이 약한 탓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을 만큼 병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그는 1906년, 파리로 건너가 여러 예술가와 어울리며 화가로서의 생활을 이어간다. 그리고 1917년, 한 화가들의 모임에서 잔 에뷔테른을 만나게 된다.

잔은 당시 화가 지망생이자 모델이었는데 모딜리아니보다 14살이 어렸다. 하지만 나이보다 조숙했던 잔에게 모딜리아니는 반하게 되고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잘생긴 외모로 많은 여성에게서 인기가 많았고 여성편력이 심했던 데다 가난하고 병약하며 마약에 빠져있던 그를 잔의 집에서 환영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잔은 모딜리아니와의 사랑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뮤즈가 되었다.

모딜리아니는 잔을 모델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결핵, 술, 마약, 심한 가난 속에서도 그의 사랑은 빛났다. 그러나 첫째 딸을 낳고 두 번째 임신이 되었을 때, 잔의 부모는 가난에 찌든 모딜리아니의 곁에 딸을 더 이상 둘 수 없다고 판단, 그녀를 모딜리아니로부터 떼어놓게 된다.

묘한 멜랑콜리와 더불어 깊은 우울감이 느껴지는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의 음악이 떠오른다.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쇼팽과 모딜리아니. 집을 떠나 파리에서 활동하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그들의 작품에선 그래서인지 동질감이 느껴진다.

1810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쇼팽 역시 어려서부터 체격이 작고 병에 자주 걸렸다.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작곡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던 쇼팽은 1832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연주회를 열게 되고 큰 성공을 이룬다. 모딜리아니와 마찬가지로 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반면 첫사랑을 위해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고서도 고백조차 못 했을 만큼 수줍고 소심한 성격이었던 그는 한 살롱파티에서 조르주 상드를 만나게 된다.

쇼팽(왼쪽)과 남장한 조르주 상드ⓒ 뉴스1

쇼팽은 남장을 하고 다녔을 만큼 주체적이며 남성 편력이 심했던 6살 연상 상드를 처음에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극적이었던 상드에게 쇼팽은 점점 빠져들게 되고 그들은 9년간의 연애를 이어가게 된다. 잔이 모딜리아니에게 예술의 영감이었던 것처럼 쇼팽은 상드와 지냈던 시기에 수많은 명곡을 만들어냈다.

'빗방울 전주곡'은 쇼팽의 프렐류드 중 15번째 곡으로, 쇼팽이 1839년 상드와 마요르카섬에서 요양을 하던 시절, 외출을 나간 상드를 기다리며 쓴 곡으로 유명하다. '빗방울'이란 제목은 훗날 붙여진 것이기는 하나 쇼팽은 실제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당시 쇼팽은 요양을 위해 마요르카섬에 갔지만 결핵 때문에 각혈이 심했던 그를 마을 사람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게다가 쇼팽과 상드는 결혼을 하지 않은 커플이라는 이유로도 가톨릭 신자였던 주민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설상가상 춥고 습한 날씨까지 더해져 쇼팽은 우울한 날들을 보내게 된다. 이 곡은 그런 쇼팽의 마음을 대변하듯 눈물처럼 내리는 빗방울을 묘사하고 있다.

쇼팽은 평생 200곡이 넘는 작품 중 몇몇 첼로 곡을 제외하고는 피아노 음악만을 작곡했다. 거기에 서정적인 멜로디와 감성이 더해져 '피아노의 시인'이라고도 불린다. 평생 피아노곡에만 몰두했던 쇼팽처럼, 모딜리아니는 평생 인물화만을 그렸다. 그는 "내가 찾는 것은 현실이냐 비현실이냐가 아니라 무의식적 인간 본능의 신비이다"는 말을 남겼는데 어쩌면 그가 인물화만을 그린 이유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다.

모딜리아니의 화풍은 독특한 것이었다. 브랑쿠시와 민속 예술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의 원시문화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조각가가 되고 싶었지만 건강 때문에 포기하고 그림에 몰두했다. 그의 작품은 긴 목, 긴 얼굴에 텅 빈 눈동자가 더해져 어느 화풍에도 속하지 않은 독창적인 형태를 띠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쇼팽 역시 폴란드의 민속음악에서 영향을 받아 마주르카와 폴로네즈를 작곡했다. 마주르카와 폴로네즈는 폴란드의 민속 춤곡이다. 고국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쇼팽은 폴란드를 늘 그리워했다. 상드와 헤어진 후 "단 한 줄의 음표도 쓸 수 없다"고 말했던 그가 죽기 전 작곡한 마지막 곡도 마주르카다.

상드와 헤어진 후 쇼팽은 곡을 쓸 수 없었다. 상드와의 이별은 쇼팽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몸은 쇠약해질 정도로 쇠약해졌고 가난이 찾아왔다. 상드와 헤어진 2년 동안 그는 단 두 곡만을 작곡했을 뿐이다.

모딜리아니 역시 잔의 부모로 인해 그녀와 떨어져 있는 동안 작품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정신만큼이나 몸의 병도 악화되어 갔다. 곁에 사랑하는 잔이 없었던 그는 마지막 작품으로 잔이 아닌 자화상을 그리고는 결핵성 뇌막염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잔이 둘째를 임신한 지 8개월이 지났을 때였다. 모딜리아니의 죽음으로 비통해하던 잔은 그가 죽은 지 이틀 후, 부모님의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모딜리아니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 '자살'이라는 그림이어서 그들의 죽음에 아픔을 더한다.

수많은 아름다운 작품을 남기고 떠난 모딜리아니와 쇼팽. 그들이 사망했을 당시 모딜리아니는 34세, 쇼팽은 39세였다.

고달픈 현실에 부딪히며 아픈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술로 승화한 이들.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작품 안에 그들의 영혼과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리라.

"당신의 영혼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림의 눈동자를 그릴 것이다."(모딜리아니)

모딜리아니(왼쪽)와 잔ⓒ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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