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김이정 작가 "역사 속 허망하게 스러진 인생 담았다"
- 권영미 기자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개인의 역사를 그가 산 흔적이자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우리 누구나가 역사의 주인공이자 모든 것이 자신의 인과응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개인을 둘러싼 국가와 사회가 만들어낸 역사는 개인의 역사를 한손에 비틀어 망가뜨릴 정도로 강력하고 무자비하기에 개인의 인생이 온전히 그 개인의 몫인 경우는 드물다.
역사는 절대로 인간에게 햇빛이나 공기처럼 공평하게 주어지지 않아왔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중에 태어난 아기들의 운명은 2000년에 태어난 아기의 운명과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다. 소설가 최인호는 자신의 소설 한 부분에 한밤중에 보초의 눈을 피해 남쪽을 향해가는 쪽배 속에서 울음소리를 낼까봐 엄마가 입을 막는 통에 숨막혀 죽어간 아기들에 대해서 쓴 적이 있다. 조용히 강으로 던져져야 했던 아기들의 운명은 오로지 바로 그 거대한 역사가 만들어낸 것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했던 집안에서 태어나 사회주의자가 된 ‘유령의 시간’(실천문학사)의 주인공 '이섭'의 인생 역시 해방 전후부터 불과 10년 정도의 역사를 거치면서 장난감처럼 망가뜨려졌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김이정 작가의 손에서 그 헛됨을 보상받았다. 소설의 주인공 이섭은 김이정 작가의 실제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인물이다.
18일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뉴스1과 만난 김이정 작가는 아버지이자 소설속 인물인 이섭의 인생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 씨는 "아버지는 평생 운명적으로 어긋난 인생을 살아왔어요. 그리고 그 대가는 온전히 아버지의 몫이기만 했죠. 기본적으로 이 책은 한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이념과 역사의 이야기보다는 한 인간의 이야기로 읽히길 원합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인생의 굴곡은 고스란히 민족의 역사와 함께 갔다.
김씨에 따르면 '이마가 아름다운 부인'을 맞아 자녀들을 두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아버지는 해방후 소란한 정국 속에서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남로당원이었던 그 대신에 경찰은 부인과 젖먹이 딸을 잡아갔다. 그 후 한국전쟁이 터지고 이리저리 도망다니던 아버지는 이념이 실현된 땅으로 생각한 북한으로 간다.
"아버지는 먼저 건너가 터전을 잡은 후 가족들을 찾아 불러들일 생각이었던 것 같았어요." 김이정 작가는 덧붙였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비참한 북한의 실정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임진강을 건너 다시 월남한다. 그러나 두 아들을 맡겨둔 형의 가족은 그 사이 그를 좇아 북으로 갔고 아내와 딸의 종적은 찾을 길 없다.
"그후 아버지는 집안의 강권으로 한 여인과 결혼했어요. 소설 중에 미자로 나오는 이로, 그가 바로 나의 어머니죠. 하지만 아버지는 두번째로 가정을 이루고 자녀도 낳지만 원래의 가족들을 못잊었어요. 아버지는 장성한 아들들이 간첩이라도 되어 고무배라도 타고 내려올까 기대했어요. 제주도에 이어 터전으로 잡은 서해안에서 밤마다 해변에 나가 자식들을 기다렸죠. 아버진 한없는 절망과 고통을 참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울부짖곤 했어요"하고 작가는 말했다.
이섭과 결혼한 미자는 친척이 맡겨 둔 폭발물을 만지다가 폭사한 정많은 전남편을 하필이면 그날 밤 전쟁이 터져 서둘러 묻어야 했던 사연을 갖고 있다. 미자는 "조금만 기다리면 살아날 것 같았는데 묻어버렸어..."하며 전남편을 체온이 식기도 전에 묻어야 했던 일을 평생 남몰래 애통해한다. 이 모습 역시 김이정 작가의 어머니 모습 그대로다.
'유령의 시간'에 담긴 비통함은 이렇게 닿을 듯 하고, 만날 듯 하고, 살아날 듯 했던 생명들이 닿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살아나지 못한 데 있다. 아마 이 부분이 수십년 전의 역사를 담고 있음에도 독자들의 마음을 묵지근하게 만들 수 있는 지점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는 죽음까지도 역사의 희생자였다. "아버지는 죽음까지도 역사에서 자유롭지 못했어요. 1975년 봄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막내 동생이 병으로 사망했어요. 아버지는 자식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시달렸죠. 그런데 그해 여름 재범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사상범을 재판없이 재수감할 수 있게 한 '사회안전법'이 발령된 거에요. 수년간 수감된 적이 있었던 아버지는 극도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로 가을 뇌출혈로 쓰러지고 일주일만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소설 속 이섭은 죽기 얼마 전인 1975년 8월 15일 자식들을 불렀다. 광복된 지 30주년인 해였다. 김이정 작가에 의하면 그 순간 이섭은 앞에 원고지와 만년필을 놓고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그리곤 '이제부터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쓸 것이다. 이 시작을 알리기 위해 너희들을 부른 것이다. 제목은 '유령의 시간'이다'고 선언했지요." 유령처럼 살아야 했던 인생에 대한 마지막 저항 같은 것일까. 하지만 그는 몇 장 쓰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김이정은 "소설 속 이섭인 아버지의 죽음 후 오빠와 나는 아버지의 글을 우리가 이어 완성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오빠 대신에 어쩌다 보니 내가 작가가 됐어요"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올 여름 숙제처럼 항상 완성을 꿈꿔왔던 아버지의 이야기인 '유령의 시간'을 완성했다. 아버지가 첫 문장을 쓴 지 딱 40년 만이다. 하지만 완성을 해서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경색된 남북관계와 사상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은 것 등은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작가는 말했다. "과연 이 오래된 이야기가 제대로 읽힐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 상황은 엄혹한 197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아 여전히 이 작품은 유의미한 것 같아요. 40년이 지나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줄 알았는데…. 역사가 이토록 진보하지 못한 것이 믿기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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