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원고지 마련하면 마음 푸근했는데…"육필원고 전시회
'한국문학의 큰별들, 육필로 만나다'
- 권영미 기자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원고지가 귀하던 시절, 문인들은 두툼한 빈 원고뭉치를 마련하면 겨울 땔감을 마련한 농부처럼 마음 푸근해 했다.
원고지는 작가가 채워나가야 할 천형이자, 꿈과 상상이 펼쳐질 터전이자, 현진건의 '빈처'의 주인공처럼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대부분의 작가가 컴퓨터로 작업하는 현재, 작가라면 의례히 있었던 오른손 중지의 펜혹도, 원고지를 앞에 둔 경건한 마음도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 문학의 대작가들의 육필원고를 통해 예전 문인들의 고뇌와 자부심의 흔적을 생생히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대표이사 김윤식)은 이번달 10일부터 '2015 유네스코 선정 세계 책의 수도'를 기념해 '한국문학의 큰 별들, 육필로 만나다'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선 우리 현대문학을 화려하게 수놓은 주요한, 고은, 김동리, 박경리, 박완서, 서정주, 김현 등 대표적인 문인 총 46명이 손으로 쓴 육필 60점이 전시됐다.
육필 원고는 문인들의 다양한 성격을 읽고 시대상도 엿볼 수 있게 한다. 박경리, 이병주 등 대하소설의 원고들은 분량부터 두툼해서 당시 손으로 글을 쓰던 시대의 문인들의 '노동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장편 소설 여러 권의 분량을 직접 손으로 써야 했으니 오른 손의 펜혹은 물론 손목 통증이 이들의 고질병이었다.
한편, 김동리, 황순원, 서정주, 박목월, 박두진 등 대가급 문인들의 원고일수록 악필이 심한 것도 특징이다. 특히 말년에 수전증을 앓은 서정주 선생의 원고는 읽는 게 아니라 해독해야 할 정도다. 백철, 박종화, 주요한 등 근대문학 시기부터 활동한 원로 문인들의 손 글씨 역시 쉽게 읽히지 않는다. 이들의 글씨는 대부분 예전 붓글씨의 전통이 남은 필체로, 획이 큰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초기부터 평론가로 활동한 김기진의 글씨는 단정하고 또박또박 알기 쉬운 정자체 글씨를 써서 이채롭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대한민국 학술원 회장)는 '청서'(원고지에 반듯하게 글씨를 써 넣은 것)로 유명해서 편집자가 별도의 교정을 보지 않아도 좋을 만큼 원고 상태가 깨끗하다. 다른 곳에 미리 원고를 작성하고 출판사에 원고를 넘길 때에 다시 정서를 한 평론가의 꼼꼼한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반면 책을 많이 내기로 유명한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악필로 유명했다.
박완서의 글씨는 온화한 인상과 섬세한 소설과는 달리 투박하고 남성적이다. 이에 비해 한국의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선굵은 작품을 써온 황석영의 글씨는 원고지 정서법에 충실하게 단정하게 쓰여 대조적이다.
원고지와 컴퓨터 글쓰기의 시대를 모두 경험한 시인 장석남은 "깨끗한 원고지를 앞에 놓고 글을 써내려갈 때면 펜이 종이 위에 긁히면서 나는 고아한 소리가 저절로 정신을 가다듬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한국문학'과 '월간문학' 등 문학잡지 편집부에서 문예지 편집과 문인 전문 사진가로 활동해온 김일주씨가 한국근대문학관에 작가들의 육필 원고 약 5600점을 기증해 가능했다. 이번 전시는 이중 60점을 선별했다. 한국문학의 큰 별들의 육필원고가 이같이 방대하게 모여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현식 한국근대문학관 관장은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 어렵게 준비한 전시"라면서 "대표 작가의 육필 원고를 거의 다 모은 이런 규모의 전시는 아마도 이게 마지막일 것”이라고 말했다.
기간:~6.14. 장소: 인천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실. 관람시간:10:00~18:00(입장은 17:30까지). 입장료 무료.
문의: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032)455-7166. http://lit.ifa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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