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신과 황금의 흔적
중년, 다시 길위에 서다 -홍윤오의 중남미 여행기
적도공화국(Republic of Ecuador), 에콰도르쿠바 아바나를 떠난 비행기는 콜롬비아 보고타 공항에 안착했다. 만식은 에콰도르 키토행 항공기로 갈아타기 위해 여기서 몇 시간을 대기해야 했다. 역시 처음 가보는 나라, 콜롬비아! 지식이 거의 없었다. 마약, 반군, 강도 등 안 좋은 이미지들이 많았다. 미국 위주의 외신이나 영화 같은 것들을 통해서만 이 나라를 접해온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보고타 공항의 첫인상은 꽤 좋았다. 우선 스마트폰의 통신 신호가 잡히고, 와이파이까지 무료였다. 통신이 먹통이던 쿠바에 있다가 오니까 비로소 문명 세계에 온 느낌이었다. 면세점들이 깔끔하게 잘 꾸며져 있었고, 오가는 사람들도 상당히 여유가 있었다.
만식은 그동안 확인할 수 없었던 문자와 메일들을 점검하고 약간의 요기를 한 후 키토행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저가항공인 데다 구간이 짧았음에도 커피와 음료까지 나왔다. 만식에게 에콰도르는 쿠바만큼이나 생소한 나라였다.
슬픈 기억들, 사라진 잉카
만식은 커피를 마시며 준비해온 에콰도르 자료를 살펴보았다. 에콰도르는 한마디로 적도의 나라다. 적도선이 지나가고 그 표식점이 있는 나라로 유명하다. 영어로 적도가 equator이고 국가명이 republic of Ecuador. 나라 이름 자체가 적도공화국이다. 최대 항구도시인 ‘과야킬’이 있고,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유명한 갈라파고스 제도가 있다. 면적은 한반도보다 좀 큰 28만 ㎢이다. 원래 좀 더 컸는데 페루와 국경분쟁 전쟁에서 패배해 국토의 40%쯤 되는 아마존 유역을 페루에 넘겼다.
수도는 키토, 해발 2,850m나 되는 고원 지역이다. 그러다 보니 한 시기, 한 도시에 4계절이 모두 있다. 아침, 오후, 저녁과 밤 날씨가 각각 4계절이 뚜렷한 나라의 봄, 여름, 가을, 겨울 날씨와 비슷하다. 인구는 메스티조와 인디오가 대부분(80%)을 차지하고 있다.
15세기 후반 쿠스코를 수도로 둔 잉카제국의 침략을 받아 복속된 후 잉카제국이 키토와 쿠스코로 분리됐을 때 다시 각각 스페인의 식민지가 됐다. 19세기 초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에콰도르공화국을 선포했고, 콜롬비아 연방(콜롬비아, 에콰도르, 베네수엘라)에 통합됐다가 탈퇴해 지금의 에콰도르가 됐다.
키토는 원래 기원전 1,000년경부터 퀴투스(태양) 부족의 수도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는 오래된 도시이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구석기나 신석기 유물들을 철저히 파괴하는 바람에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잉카의 마지막 왕자 두 명이 반군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잡혀서 화형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이로써 잉카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도시가 바로 키토이다.
잉카는 사실 쿠스코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잉카의 6대 왕이 퀴투스 부족과의 싸움에서 지면서 화평조건으로 퀴투스 부족의 공주와 결혼했고, 그 아들 아타우알파를 잉카제국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 바람에 20년 동안 내란을 겪었다. 결국 아타우알파가 승리했으나 스페인 정복자들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인질로 잡힌 아타우알파는 자신이 갇힌 방의 벽에 자기 키만큼 선을 그어, 그만큼 황금을 채워주겠다고 약속했다. 아타우알파는 약속을 지켰으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훗날 약속을 어기고 그를 죽였다고 한다. 이때 모아놓았던 황금이 키토 근처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도 있다. 만식은 키토와 잉카제국의 아픈 역사를 되새겨보며 잠깐 눈을 붙였다.
공항서 얻은 우연한 행운?밤 11시가 넘은 시각. 키토공항 부근에 다다르자 높은 산들과 불이 환한 도시의 전경이 바로 비행기 아래로 들어왔다. 핀친차(pinchincha)화산의 중심을 떠받치고 있는 키토가 해발 2,850m의 고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만식은 마음이 급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라 시내로 가는 대중교통이 끊어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비싼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출국장을 나서는 만식의 눈에 친근한 글씨가 보였다. 누군가가 들고 있는 피켓에 어느 한국 기업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서, 이 시간에, 우리나라 사람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피켓을 든 현지인에게 물었다.
“혹시 한국 사람을 기다리나요?”
그러자 그 기업의 현지 고용인인 호세가 대답했다.
“보스가 곧 도착하는데 시내에 있는 호텔이면 같이 가자고 해보세요.”
호세는 참 똑똑해 보였고 순발력도 좋았다. 만식의 어려운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다. 어쩌면 한국인이 드문 곳에서 한국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한국 특유의 문화에 익숙해진 탓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해보았다.
호세와 한참을 기다린 끝에 한국 기업인이 나타났고 고맙게도 흔쾌히 근처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그는 중년의 나이에 혼자 여행하는 만식에게 “키토의 치안이 아직은 많이 불안하니 조심하라”는 당부를 몇 차례나 했다.
호텔에 도착한 만식은 덕분에 편하게 온 것에 대해 연신 감사의 말을 건네면서 서둘러 내렸다. 그런데 아뿔싸! 뜻밖의 행운에 너무 흥분했던 탓인가. 여권이 들어있는 작은 가방을 차에 놓고 내린 것이다.
밴 차량의 제일 뒷좌석에 둔 터라 호세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운전사 이름이 호세라는 것, 기업인에게 건네받은 명함, 그리고 언뜻 그 기업인이 H호텔에 방을 잡았다고 귀동냥한 것 정도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새벽 1시.
치안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도로로 뛰어 나왔다. 지나가는 택시를 무조건 세운 뒤 큰소리로 외쳤다.
“렛츠 고, H 오뗄, H 오뗄!”
호텔에 도착해 달려 들어가니 마침 그 기업인이 엘리베이터를 막 타기 직전이었다. 만식은 숨을 헐떡이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러나 호세의 차는 이미 출발했고 자신도 호세 전화번호를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그는 몇 군데 전화했고 1시간쯤 지나서야 겨우 호세와 연결이 됐다. 호세는 여권을 찾아 뒤늦게 다시 차를 몰고 왔다. 만식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고마움의 표시로 호세에게 사례비를 쥐어줬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 만일 그 돈으로 공항에서 바로 택시를 탔다면 이미 숙소에 도착해 잠에 들 시간이었다. 조금이라도 경비를 아껴보려다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날렸다. 그뿐만 아니라 호의를 베푼 사람들까지 번거롭게 만든 셈이 돼버렸다. 그 후로도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곤 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 행운만 오는 법도 없다. 좋은 일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눈앞의 황금을 집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다른 소중한 것의 상실임을 잊지 말기를.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세상은 늘 공평한 것 아닌가.』
잉카의 마지막 도시, 키토
키토는 기대한 대로 멋진 도시였다.
밤새 해프닝을 겪고 잠까지 설친 만식의 눈에 키토는 오래된 안달루시아풍 구시가지와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매력적인 도시였다.
한때 이곳은 북방 잉카제국의 수도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보존이 잘 된 올드타운 중 하나이다. 그래서 이곳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스페인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나 지역들이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산재해 있지만 키토처럼 대규모로 잘 보존된 곳은 없다고 한다.
만식은 지하철을 타고 일단 ‘올드 센트로’로 향했다. 중남미 지역에는 대부분 도시에 올드 센트로 지역이 있다. 대개가 당시 식민지 시대 모습을 보여주는 스페인 남부풍이다. 가운데는 중앙광장이나 무기고를 뜻하는 아르마스 광장이 있다. 그 주변으로 총독관저와 대저택이, 대성당과 주교관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키토시도 마찬가지이다. 중앙광장 부근에 ‘산 프란시스코 교회’, ‘산토도밍고 성당’을 비롯해 국립박물관, 민속박물관, 시립박물관 등이 다 모여 있다. 만식은 올드 센트로를 천천히 걸어 다녔다. 박물관처럼 꾸며진 성당도 있었다. 한 성당에는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마리아 십자가상’도 있었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고? 이런 십자가는 유럽 등 다른 대륙에서는 볼 수 없는 것 같은데.’
만식은 그런 의문과 함께 중남미에 있는 예수상서 왠지 섬뜩함을 느꼈다. 키토의 산 프란시스코 교회에 딸린 박물관을 돌아볼 때에는 몇 차례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전율을 경험했다. 예수상의 얼굴은 원주민을 닮았고 어떤 예수상은 커다란 치마를 입고 있기도 했다. 특히 예수가 피를 흘리는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돼 있었다. 식민의 고통을 감내하고 사랑으로 승화시키려는 자들의 아픔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중남미 카톨릭 교회의 예수상이 더욱 처절해 보이는 이유는 피비린내 나는 역사 때문이 아닐까. 기독교로 무장한 정복자들에게 학살당하고 개종되고 혼혈 자손들을 퍼뜨릴 수밖에 없었던 피식민 지배의 역사.』
만식은 택시를 타고 그곳을 올랐다. 가파르지만 그리 멀지 않은 산길인데 치안이 안 좋기 때문에 대부분 택시를 이용한다고들 했다.
언덕 위에 오르니 과연 키토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녹색 양탄자 같은 산들이 도시를 가로지르거나 둘러싸고 산자락들 중간 중간에 건물과 마을들이 들어서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마리아상이 우뚝 서 있었다. 다른 대륙의 마리아상과는 다르게 어깨에 천사의 날개가 달려있고 위로 끌려 올라가는 형태였다.
택시 운전사 산체스는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최후의 날에 승천하는 성모 마리아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마리아상은 비행기 재료로 만들어졌어요. 1979년 키토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도시로 지정된 것을 기념해 프랑스에 주문해서 20년 만에 만들었다고 해요.”
산체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언덕 이름이 빵 덩어리인 데는 몇 가지 설이 있어요. 스페인 사람들이 금을 빵 모양으로 만들어 묻어놓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독립전쟁 당시 이곳에서 빵을 만들어 독립군들에게 나눠줬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언덕을 내려온 만식은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텔리페리코(케이블카)가 있는 곳으로 갔다. 케이블카로 높이 4,000m가 넘는 화산 분화구 근처까지 올라갔다. 만식이 작년에 갔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높이가 4,130m이니까 거의 비슷한 높이였다.
그곳에 오르니 일 파네시오 언덕에서보다 더 넓게, 더 멀리까지 키토시 전체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시시각각 날씨가 변해 해가 비쳤다가 금세 구름으로 뒤덮이기를 반복했다. 순간 만식은 약간 어지럽고 숨이 찼다. 고도가 높은 데서 오는 고산증 증세였다.
만식이 고도를 의식한 것이 먼저인지 고산증 증상을 느낀 것이 먼저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미타드 델 문도, 적도선
만식은 다시 차를 타고 키토시에서 북쪽으로 1시간 정도를 더 달려 적도탑과 적도선을 찾았다. 적도탑은 미타드 델 문도(MItad del Mundo, 세상의 중심이라는 뜻)라고 한다. 독일 출신의 지리학자 훔볼트가 19세기에 측정해서 확정시킨 적도선이 지나가는 곳이다.
인공위성으로 정확하게 측정한 지리적, 수리적 적도선은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인티 난’(Inti Nan)이란 곳이다. 만식이 놀란 것은 훔볼트도 잘못 측정했던 적도선을 인디오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적도탑, 즉 미타드 델 문도에는 위에 둥그런 공 모양의 돌이 얹혀 있는 오벨리스크 같은 탑이 있다. 네 군데의 옆면에는 동서남북이 각각 표시돼있다.
작은 투우장과 성당도 있었다. 성당 바닥 한가운데로 적도선이 지나갔다. 한쪽은 남반구, 다른 한쪽은 북반구에서 미사를 보는 셈이다.
진짜 적도선인 ‘인티 난’은 일종의 민속촌처럼 꾸며놓았다. 만식은 이곳에서 적도선에서만 나타나는 재미있는 현상들을 경험했다.
안내인은 통에 물을 채웠다. 물 위에 나뭇잎을 띄워 놓고 통 아래쪽 마개를 뽑으니 나뭇잎들이 전혀 회전하지 않고 그대로 쑥 빨려 내려갔다. 그런데 불과 4~5미터 정도 남쪽, 북쪽으로 옮겨 실험하자 나뭇잎이 각각 시계방향, 시계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면서 빨려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적도선 한쪽에는 못이 박혀있었다. 만식이 안내인의 설명에 따라 못대가리 위에 계란을 세웠더니 똑바로 섰다.
눈을 가리고 적도선을 걸어보니 똑바로 걸을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적도선 위에 서서 손가락에 힘을 주었는데 이상하게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잘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과학 시간에 배운 것들이긴 했지만 실제로 그런 현상들을 경험해보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홍윤오
서울대에서 언론정보학을 전공하고 한국일보에서 14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이후 공공기관 및 대기업 임원, 회사 경영, 정당 대변인까지 다양한 경험을 했다. 9.11테러 직후 한국 기자로서는 최초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 전쟁의 참상을 알린 ‘아프간 블루스’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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