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균에 맞서 싸우는 '면역글로불린' 품귀…병원은 난리, 당국 '헌혈부족' 탓만

1,2차 병원은 재고 바닥…대학병원들 돌려막기 형국
의료계 "헌혈이 아니라 과도한 규제가 근본원인"

(서울=뉴스1) 천선휴 강승지 황진중 기자 = "면역글로불린 재고가 없어서 못 맞는대요. 다른 병원도 그런가요?" (암 환자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두세 달 전부터 대학병원들끼리 서로 빌려 쓰고 있는 상황이에요. 1, 2차 병원은 아예 재고가 없죠." (이나미 중앙대학교 광명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

면역글로불린 부족 사태로 환자도 의료진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1, 2차 병원은 재고가 아예 없어 면역글로불린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대학병원도 재고가 넉넉지 않아 상태가 안 좋은 환자들을 선별해 사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 암 환자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커뮤니티 캡처)

면역글로불린은 세균, 바이러스와 같은 외부 물질과 싸워 우리 몸을 지키는 면역체계다. 항원(침입자)에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항체 작용을 한다. 면역글로불린 제제는 헌혈로 공급받은 혈장으로 만드는데 자가면역질환, 가와사키병, 자가면역 뇌염, 이식 환자의 거부반응 등에 쓰인다. 특히 어린아이들이 많이 걸리는 가와사키병에 제일 흔하게 사용된다.

16일 병원 등에 따르면 면역글로불린 제제가 유례없는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이나미 중앙대학교 광명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원인 불명의 급성 열성 혈관염인 가와사키병은 아이들에게 흔하게 발생하는 질환인데 면역글로불린 제제는 치료에 필수적이고 응급한 상황에 사용된다"면서 "'이게 왜 없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고가 바닥나 대학병원들이 서로 연락해 빌려 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재고를 계속 확인하는데 간당간당해 꼭 필요한 아이들에게만 쓰고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최용재 대한아동병원협회 부회장(튼튼어린이병원장)도 "1, 2차 병원은 면역글로불린 제제가 아예 없다"면서 "대학병원도 거의 바닥난 상황이다 보니 가와사키병의 경우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가 이 약이 나오기 전에 쓰던 '스테로이드 펄스 치료법(고용량 스테로이드를 하루에 한 번 최대 3일까지 주사하는 요법)'을 다시 쓰겠다는 지침을 배포하겠다는 얘기까지 돌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면역글로불린 제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약처럼 쉽게 쓸 수 있는 약이 아니다. 소아·중환자 치료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의약품이어서 이 같은 품귀현상은 환자들에겐 치명적이다.

이 때문에 지난 8일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대한적십자사 등 관계부처가 모여 머리를 맞댔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다. 식약처 관계자는 "몇 개월 전부터 유관 부처랑 협의 중인데 공급량을 되돌리기 쉽지 않다"면서 "공급가 인상이나 미국 외 해외 공급망 추가 등을 검토하는데 국내 헌혈을 독려할 방안이 최우선"이라고 말했다.

한 의료진이 주사기에 주사액을 넣고 있는 모습.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식약처의 말처럼 면역글로불린 제제의 공급난이 발생한 데는 헌혈 인구의 감소도 일부 원인이 있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국내 헌혈 혈장 공급량은 2017년 57만7841건에서 지난해 47만4103건으로 감소했다. 이는 면역글로불린 제제 공급량 감소에도 영향을 미쳤다. 2017년 면역글로불린 제제 공급량은 8422kg이었지만 지난해 6164kg으로 줄었다. 다급해진 식약처는 이달 초 교육부에 고교생 헌혈 독려를 위해 "대학입시에 헌혈 봉사활동 실적 인정 기준을 확대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의료계는 이번 사태가 단순히 헌혈 감소의 문제는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식약처의 '헌혈 독려' 호소에 "정신 나간 소리"라며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과도한 규제와 터무니없는 약가에 있다"고 쓴소리를 냈다.

최용재 대한아동병원협회 부회장이 지난 6월 서울 마포구 대한병원협회에서 열린 '소아 청소년 필수약 품절 실태와 정상화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뉴스1 ⓒ News1 구윤성 기자

현재 국내에서 면역글로불린 제제 공급은 두 곳의 제약사가 담당하고 있다. GC녹십자와 SK플라즈마다. 면역글로불린 생산 원료인 혈장을 적십자로부터 배분받아 만든다. 이때 혈장은 우리나라 국민의 헌혈을 통해 확보하거나 식약처의 인증을 받은 국가에서 수입해 생산한다.

하지만 제약업계 측은 우리 국민의 혈장으로는 수급의 균형을 맞추기 힘든 상황인데, 정부 인증을 받은 해외 혈장 수입국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설명이다. 해외 수출용 면역글로불린 제제는 혈장을 어느 나라에서나 수입해 써도 된다. 하지만 국내용은 식약처가 인증한 곳에서만 혈장을 가져와 쓸 수 있다.

식약처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입장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WHO 로마선언 3대원칙인 자급자족, 공공성, 안전성 때문에 매혈하는 국가인 미국에서만 원료 혈장 가져와 쓸 수밖에 없다"면서 "지금 인도네시아도 타진해 봤지만 자족이 돼야 남는 혈장 수출해줄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가격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식약처에 따르면 적십자가 공급하는 국내산 혈장 가격은 1리터당 11만4000원이다. 수입 혈장은 올해 20만원을 넘어섰다. 이렇게 공급받은 혈장으로 면역글로불린을 만들면 국내엔 50㎖(5%) 6만원대, 200㎖(10%) 42만원 대에 판매한다. 반면 외국에는 5배 이상의 가격으로 팔 수 있다. 제약사 입장에선 수출에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GC녹십자와 SK플라즈마는 국내 공급이 부족한 면역글로불린 제제를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GC녹십자는 지난 6월 브라질 현지 파트너사인 블라우(Blau Farmaceutica)와 면역글로불린 제제인 '아이비글로불린-에스엔(IVIG-SN 5%)'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한화 약 1194억원 규모다.

하지만 복지부는 약가를 당장 올릴 수도 없는 데다 5배가 넘는 수출가에 맞춰 약가를 올리기도 힘들다는 입장이다. 제약사 관계자는 "약가가 너무 낮아 상대적으로 비싼 해외 혈장으로는 마진이 거의 남지 않는다"면서 "약가를 인상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만 약가 인상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용재 대한아동병원협회 부회장은 "제약회사 입장에선 이 약을 만들면 만들수록 손실이 나는 상황"이라면서 "정부가 터무니없는 규제로 필수의약품 공급 탄력성을 없애버리고 시장균형을 말살해 국민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을 가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자가면역성 뇌염도 면역글로불린 제제를 선제적으로 사용하는 게 학술적으로 의미가 있는데 인공심폐기를 달았을 때 써야만 의료보험이 된다"면서 "중증으로 발전하는 걸 막을 수 있는데도 중증이 돼야만 이 약을 쓸 수 있는 촘촘한 규제 때문에 생명을 구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다"고 했다.

최 부회장은 "성인 약은 의사가 전문의약품 중에 골라서 쓰면 되는데 어린 아이들은 신약을 쓰면 안 되고 수십 년간 써왔던 필수의약품을 써야 한다"며 "부디 안타까운 생명들을 생각해 규제를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복지부, 식약처, 적십자사 등 관계부처는 다음달 회의를 열어 대책을 논의한다는 입장이다.

sssunhu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