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CC도 D램 닮아가네"…'고사양 집중' 글로벌 공급망 지각변동

무라타 범용 일부 정리…삼성전기 4분기 가격 인상 전망
AI용 생산 확대에 범용 제품 공급 제약…대만·중국 대체 변수

삼성전기 임직원이 세종 사업장에서 생산시설을 점검하고 있다.(삼성전기 제공)/뉴스1

(서울=뉴스1) 황진중 기자 = 인공지능(AI) 수요가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시장에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 무라타는 일부 범용 제품을 단종하기로 했고 삼성전기(009150)는 제품 가격 인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MLCC 수요가 급증하면서 삼성전기를 비롯한 주요 업체들이 수익성이 높은 고사양 제품 생산에 주력하면서 나타난 현상들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에 집중하면서 범용 D램 생산을 줄이는 현상이 MLCC 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무라타 일부 품목 단종…고사양 중심 생산 재편

15일 업계에 따르면 무라타는 범용·차량용 등 9개 MLCC 시리즈의 일부 제품에 대해 단종 절차를 개시했다. 최종 주문 기한은 2028년 3월 31일, 마지막 출하일은 2029년 3월 31일로 전해진다. GRM·GRJ·GRT 시리즈 중 일부 제품이 단종 대상에 포함됐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무라타가 크기가 크고 가격과 수익성이 낮은 제품을 정리해 소형·고용량 제품 중심으로 생산 구성을 바꾸려는 것으로 풀이했다. AI 서버·데이터센터·전장용 제품을 확대하는 흐름과 맞물려 2027년 이후 생산능력 배분과 증설 우선순위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했다.

MLCC는 전기를 일시적으로 저장했다가 공급하고 전압 변동과 전기적 잡음을 줄여 반도체의 안정적인 작동을 돕는 부품이다. AI 서버는 전력 소비가 많고 반도체 주변의 부품 배치 공간이 제한돼 작은 크기에 높은 용량과 신뢰성을 갖춘 제품이 필요하다.

고사양 제품에 생산 자원이 몰리는 현상은 앞서 D램 시장에서도 나타났다. HBM은 여러 D램 칩을 쌓아 AI 반도체에 대량의 데이터를 빠르게 전달하는 메모리다. 메모리업체들이 HBM과 서버용 제품을 확대하면서 다른 제품에 배분할 생산 여력이 줄어들었고 구형 제품 감산까지 겹치면서 범용 D램 가격이 급등했다.

마이크론은 지난 6월 실적발표 설명자료에서 HBM 수요 증가와 세대 전환에 따른 생산 부담 확대가 비HBM 공급을 압박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저장용량을 생산하더라도 HBM에 더 많은 생산 자원이 필요해 다른 D램의 공급 확대가 제한되는 구조다.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를 손가락 위에 올려 놓은 모습.(삼성전기 제공)/뉴스1
삼성전기, AI용 장기계약 확대…생산 여력 확보 나서

삼성전기는 AI용 MLCC 장기공급계약(LTA)을 확대하고 있다. 올해 공시한 AI 서버용 MLCC 공급계약 3건은 총 1조 8213억 원 규모로, 모두 2027년 한 해 동안 공급하는 조건이다.

AI 서버용 MLCC는 일반 제품보다 고용량·고신뢰성이 요구되는 고성능 제품이다. 해당 제품의 수주 물량이 늘면서 한정된 생산능력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격 정책에도 이런 변화가 반영될 것으로 예상된다. 트렌드포스는 지난달 삼성전기가 고객사를 대상으로 4분기 소비자용 X5R 제품 가격을 평균 25~30%, AI 서버용 X6S 제품은 10~20% 인상할 것으로 전망했다.

트렌드포스는 소비자용 제품의 예상 인상률이 더 높은 데 대해 주문 유입을 조절하고 고사양 제품 생산 여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일부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의 MLCC 가동률은 90% 후반까지 높아져 추가 공급 여력이 제한적인 것으로 전해진다.

고의영 iM증권 애널리스트는 "범용 생산 축소 압력이 더 커지고 있다"면서 "업황 수급이 타이트해지며 공급 업체의 가격 협상력이 더 강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삼성전기는 고사양 제품의 적용 범위를 넓히고 있다. 지난 7월에는 800V 직류 전력 체계에 대응하는 정격전압 1000V MLCC를 소개했다. GPU 주변에 쓰이는 소형·고용량 제품에 더해 AI 데이터센터 전력 공급 장치에 필요한 고전압 제품 수요에 대응하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유통 가격 강세…대체 공급 확대가 변수

소비자용 MLCC의 공급 제약과 가격 상승은 이번 무라타 단종 보도 이전부터 관측됐다. 트렌드포스는 지난 7월 일본·우리나라 업체들이 AI용 고사양 제품으로 생산을 전환하면서 1~22마이크로패럿(μF) 중·고용량 소비자용 MLCC의 생산 여력이 크게 줄었다고 분석했다.

당시 주력 MLCC 재고는 대체로 30일분 아래로 낮아졌고, 재고를 선제적으로 확보한 유통대리점의 가격 인상 폭은 평균 20~25%로 파악됐다. 소비자용 전자기기 수요가 부진한 상황에서도 공급 부족을 우려한 고객들의 긴급 주문이 유통 가격을 밀어 올렸다는 설명이다.

대체 주문은 대만·중국 업체로 이동하고 있다. 트렌드포스는 지난달 중·고용량 소비자용 제품의 이전 주문을 흡수한 일부 업체의 가동률이 90%에 근접했다고 설명했다. 해당 제품군을 중심으로 이들 업체의 4분기 평균 가격 인상률을 10~20%로 예상했다.

김운호 IBK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AI 서버 확장으로 고용량 제품에 대한 필요성이 급증하고 있다"면서 "MLCC 가격 인상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판단한다"고 전했다.

한편 글로벌 자산운용사 글로벌 X는 세계 MLCC 시장이 지난해 150억 달러(약 20조 2000억 원)에서 2030년 300억 달러(약 40조 4000억 원)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AI·데이터센터용 제품이 2030년 전체 MLCC 매출의 3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했다.

ji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