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 칼럼] HD현대오일뱅크와 권오갑 명예회장
김화진 미시간대 로스쿨 석좌교수
석유화학공장은 산업적 아름다움의 차원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다. 끝없이 이어지고 다 합하면 서울-부산 길이의 거대한 배관과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증류탑이 공장의 이미지다. 인간의 기술과 산업 역량이 집약된 거대한 '철의 숲'으로 불린다. 이 숲은 중단없이 하얀색 증기를 뿜어내기 때문에 마치 살아있는 뭔가로 보이고, 밤에는 수많은 조명이 별자리처럼 반짝이는 장관을 연출한다. 검은 원유를 수천 가지 첨단 소재와 생활필수품으로 바꿔 주는 거대한 혁신 플랫폼이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이 정유시설은 전시에 적국 드론의 공격 대상이기도 하다. 미 육군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3000~5000명 규모의 여단급 전투 병력은 매일 500톤의 보급품을 소모하는데 90%가 연료와 식량이다. 연료의 확보는 한 국가의 경제적 생산력뿐 아니라 전쟁 역량까지 결정짓는다. 그래서 석유화학, 정유공장은 보안 관리가 엄격한 국가중요시설로 취급된다. 국내에는 SK에너지, GS칼텍스, S-OIL, 그리고 HD현대오일뱅크가 있다.
구 현대오일뱅크였던 HD현대오일뱅크는 현대건설처럼 현대가 잃었다가 '다시 찾아온' 회사다. 우리 상법상 회사는 주주의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경영권을 되찾아 왔다는 의미다. 고(故) 아산 정주영 회장이 창업했다가 어떤 이유로 현대의 품을 떠났던 회사를 다시 찾아오는 일들이 있는 것을 보면 현대는 매우 낭만적인 회사인 것 같다.
회사는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기 위한 편의로 만들고 없애고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의인화할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뭔가 '우리'의 공통된 기억과 애환, 기쁨이 그 안에 스며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같이 일한 사람들과의 유대와 기억 때문일 것이다. 회사는 법인이지만 일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다. HD현대오일뱅크, 현대건설도 그에 해당한다. 이른바 오너 경영의 강점 중 하나가 여기서 발현된다. 책임감이다. 선대에서 일군 회사는 어려울 때 이별했다가도 여건이 조성되면 다시 찾아와서 원상회복시키겠다는 뜻이다. 보낸 회사도 악착같이 찾아오려고 하는데 지금 경영하고 있는 회사가 잘 운영되고 지속되도록 노력하겠다는 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HD현대오일뱅크는 역사가 다소 복잡하다. 회사의 전신은 1964년 부산에 설립됐던 극동정유다. 국내 최초의 민간 정유회사였다. 극동정유에는 1968년부터 네덜란드·영국 회사 로얄더치·셸이 합작투자로 참여했다. 1969년에 로얄더치·셸이 투자를 늘리면서 상호가 극동셸석유주식회사로 변경됐는데 1977년에 로얄더치·셸이 철수하면서 상호가 극동석유로 변경됐다. 이때 현대그룹이 지분 일부를 취득했다. 1984년에는 미국의 게티오일이 합작투자로 진입했고 1988년에 상호를 극동정유로 바꿨다. 1989년에 대산공장을 지었다.
극동정유는 재정난과 걸프전으로 인한 유가 급등으로 타격을 받았고, 1993년 7월에 현대그룹이 현대중공업을 통해 인수하면서 현대정유가 됐다. 인수 이듬해에 오일뱅크 브랜드를 론칭했고 3년 만에 435개였던 주유소 수를 1020개로 늘렸다. 지금은 약 2500개다. 점유율 20%로 SK에너지에 이은 2위다.
1999년에는 구 경인에너지인 한화에너지를 인수해서 인천정유를 만들었다. 그러나 오일뱅크는 외환위기의 여파로 경영난을 겪게 돼 그해 12월에 지분의 50%를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 IPIC에 5억 달러에 넘기면서 계열분리됐다. 2002년에 현대오일뱅크가 됐고 IPIC가 경영권을 인수했다.
IPIC는 2006년에 공개입찰 방식으로 회사의 매각을 추진한다. 국내 석유회사들과 코노코가 입찰에 뛰어들었다. 그때 현대중공업이 1999년에 매각했던 지분 50%에 대한 콜옵션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콜옵션을 행사한 후 사안을 ICC 국제중재에 부쳤고, ICC는 2009년 11월 IPIC의 계약 위반을 인정했다. 더해서 IPIC가 지분 70%를 현대중공업에 전량 넘겨야 한다고 판정했다. IPIC는 2010년 8월에 현대중공업에 지분을 매각했다. 현대중공업은 지분 91.13%를 확보하면서 오일뱅크를 되찾았다.
인수 후 현대중공업은 권오갑 현 HD현대 명예회장을 사장으로 투입했다. 권오갑 사장은 IPIC 하에서 다소 어수선하게 경영되던 회사를 4년의 기간에 걸쳐 말끔하게 환골탈태시키고 성공적으로 사업고도화 작업을 진행했다. 권 사장은 오일뱅크 재임 동안 영업이익을 1300억 원대에서 1조 원대로 성장시켰다. 거의 기적 같은 성과였다. 오일뱅크는 2010년대 중반 최악의 조선업 위기 때 탄탄한 현금 창출력으로 현대중공업그룹을 지탱해 준 회사이기도 하다. 오일뱅크가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HD현대가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HD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은 하루 69만 배럴 규모의 원유를 정제한다. 중질유를 재분해할 수 있게 설비를 고도화했다. 석유화학 아로마 틱 사업 수직계열화가 완성됐고 윤활기유, 석유화학, 제철화학, 유류 저장 사업 등 비정유사업 확대로 사업다각화를 계속하고 있다. 상업용 유류 저장 사업은 국내 유일이다. 회사의 홈페이지는 ‘지상유전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고 회사를 소개한다.
HD현대는 2019년 12월 사우디 아람코로부터 지분 17% 매각대금 1조 3749억 원을 받았다. HD현대는 그 돈을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차입금 상환과 스마트선, 스마트물류 등 신사업 투자에 사용했다. 또 아람코를 HD현대오일뱅크의 2대 주주로 맞이해서 아람코와 조선, 엔진, 화학 등에서 사업 협력도 강화했다. 현대자동차와 현대제철이 지분의 각각 4.35%, 2.21%를 보유하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오일뱅크에서는 창업자의 나눔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임직원들이 월급의 1%를 1%나눔재단에 기부한다. 햅쌀 수매와 우럭 방류 같은 사업으로 지역 농어민을 지원하고 있는데,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의 일환이다. 또 정유공장은 인원과 시설에 대한 안전이 최우선인 곳이다. 필자가 오일뱅크를 방문해 본 소감도 안전과 친환경에 가장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최고시설 자랑말고 최고안전 자랑하자'는 표지도 보였다.
회사의 공식적인 경영이념도 '이해관계자 가치 증진'과 '신뢰받는 기업이 되기 위한 경영' 둘이다. 그룹 가치체계에는 '지속 가능한 미래 에너지 생태계 구현'이 포함돼 있다. 기술혁신으로 글로벌 탈탄소 에너지 전환을 주도하겠다고 한다. 2021년부터 연차보고서와 별도로 지속가능경영보고서가 매년 발간되고 있고, ESG 데이터는 회사 홈페이지에 게시돼 있다. 상생과 동반성장 차원에서 주요 협력사에 대한 공급망 ESG 평가도 실시해 ESG 가이드와 컨설팅을 제공한다.
챗GPT에 권오갑 명예회장의 업적을 물으면 바로 몇 가지를 든다. 첫째, 그룹 지배구조 개편 및 HD현대 출범, 둘째, 조선업 위기 극복(2014~2017), 셋째, 한국조선해양 체제 구축, 넷째, 대우조선해양 인수 추진, 다섯째, 사업다각화(에너지와 건설기계), 여섯째, 글로벌 경쟁력 강화 등이다. AI는 물음의 형태와 타이밍에 따라 답을 조금씩 다르게 내놓기도 하는데 '현대오일뱅크의 정상화'를 꼽기도 한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는 EU(유럽연합) 경쟁 당국의 반대로 무산됐지만 조선산업 재편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챗GPT는 말한다. 종합 평가는 '위기상황에서 그룹을 살리고 체질을 바꾼 리더십의 발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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