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제지업계, 뼈를 깎는 자성과 쇄신이 필요한 시점

국내 주요 제지사 6곳…과징금 3383억 '역대 최대'
투명한 경쟁 질서 세우고 체질 개선하는 계기 돼야

ⓒ 뉴스1 윤주희 디자이너

(서울=뉴스1) 신민경 기자 = 기자 생활 3년 차, 앞이 막막하던 시절 평소 존경하던 부장에게 물은 적이 있다. "부장은 제 연차 때 어떻게 공부하셨어요?". 돌아온 답은 담백했다. "나라고 왜 너 같은 시절이 없었겠나. 비 온 뒤에 땅이 굳는 법이다."

당시엔 그 말이 소위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뻔한 위로로만 들렸다.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냐"라던 예능 프로그램 속 대사처럼 냉소하며 그 시절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말은 예언에 가까운 통찰로 다가왔다. 풍파는 단순히 고난이 아니라 내실을 다질 '강제적인 기회'이기도 했다.

산업에서도 생존 공식은 통한다. K-뷰티가 대표적이다. 중국 시장 봉쇄라는 혹독한 겨울을 보낸 뒤, 이들은 북미라는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다. 시련에 떠밀려 체질을 개선한 것이 오히려 '호황기'라는 반전의 밑거름이 됐다.

중소기업계의 시선은 요즘 유독 시린 봄을 견디고 있는 제지업계로 향하고 있다. 지난달 공정위는 인쇄용지 가격 담합을 이유로 국내 주요 제지사 6곳에 3383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대가는 혹독했고, 시장의 시선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과징금의 무게는 숫자로 보이는 그 이상이다. 한 해 영업이익을 고스란히 쏟아부어도 모자란 금액은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흔들고 있다.

매서운 매질이 업계 '침몰'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공정위의 조치는 독과점 구조를 깨고 시장 질서를 바로잡으라는 엄중한 경고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값을 치르는 지금, 업계에 필요한 것은 비난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지혜'를 짜내는 일이다.

다행히 위기 속에서도 변화의 씨앗은 싹트고 있다. 종이 생산을 넘어 중동 사태로 비닐 위기를 대체할 신소재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등 고강도 체질 개선에 나선 제지 기업들이 눈에 띈다. 이제 생존을 위한 탈바꿈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지금 제지업계에 필요한 것은 뼈를 깎는 자성과 함께 다시 일어서겠다는 의지다. 정부와 시장의 처분이 산업 근간을 흔드는 '독'이 아니라, 투명한 경쟁 질서를 세우고 체질을 개선하는 '약'이 되길 바란다.

smk503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