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환경 규제 뒤집기…'車·배터리' 비상, '이중 규제' 우려

美 '위해성 판단' 폐기…車 EV 성장 둔화 가속 하이브리드 대안 부상
투자세액 공제·연방-주정부 이중규제 등 기업 '불확실성' 확대 우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온실가스의 위해성 결정을 폐기한다는 발표를 하고 있다. 2026.02.12. ⓒ AFP=뉴스1

(서울=뉴스1) 박기범 박종홍 기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온실가스 규제를 사실상 백지화하면서 기업들은 친환경 로드맵을 전면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당장 미국의 전기차 전환은 상당 기간 뒤로 늦춰지고 태양광 발전 등 신재생 에너지 보급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반면 원유 등 화석 연료 개발과 소비가 확대될 것으로 보여 정유와 석유화학 기업들은 반기는 분위기다.

기업 입장에서는 관세 복병에 이어 또 하나의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하는 처지다. 일부 주지사들은 온실가스 규제를 계속 이어간다는 입장이어서 미국 내에서도 다른 규제가 적용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유럽연합(EU) 등은 여전히 온실가스 규제를 강화하고 있어 미국과 EU 수출품을 다르게 설계해야 하는 상황도 부담이다.

트럼프 "오바마 시대의 재앙적 정책"…위해성 판단 폐기

트럼프 대통령은 온실가스 규제 근거로 활용돼 온 '위해성 판단'을 폐기한다고 12일(현지시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해당 정책을 "오바마 시대의 재앙적 정책"으로 규정했다.

이번 조치의 핵심 타깃은 자동차 산업 규제 완화다. 트럼프는 "위해성 판단이 '그린 뉴 스캠(녹색 사기극)'의 법적 근거가 돼왔다. 이번 폐기 결정으로 전기차 강제 구매 압력이 사라지고 내연기관차에 대한 제재가 풀릴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미국 전기차 시장이 당분간 제자리 걸음을 할 것으로 예상했다.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가 발표한 '2025년 미국 전기동력차 시장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순수 전기차 판매량은 125만7792대로 전년 대비 1.2% 증가에 그쳤다.

특히 세액공제 혜택이 종료된 이후 판매 감소세가 뚜렷했다. 3분기까지 전기차 판매가 14% 성장했지만, 세제 지원 종료 이후 판매량이 급감했다. 여기에 위해성 판단까지 폐기되면서 전기차 시장 성장 속도가 추가로 둔화할 것이란 분석이다.

내연기관 아닌 하이브리드 대안 부상

업계에서는 전기차 수요 둔화가 곧바로 내연기관 차량의 급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신 전기차와 내연기관차 사이에서 가격과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한 하이브리드 차량이 대안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실제 지난해 하이브리드차 판매량은 205만3882대로 전년 대비 27.6% 증가하며 미국 자동차 시장 성장을 견인했다.

국내 기업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이다. 현대차·기아는 지난해 미국에서 전년 대비 12.9% 감소한 12만9809대의 전기차를 판매하며 전기차 시장 둔화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하이브리드 차 중심으로 라인업을 빠르게 재편하면서 미국에서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올해 1월 현대차 하이브리드 판매량은 전년 대비 51.9% 증가한 1만4316대, 기아는 83.8% 증가한 1만3173대를 기록했다. 반면 전기차 판매량은 4471대로 33.7% 감소했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미국 시장에서 전동화 정책 동력이 약해질 경우 전기차 중심 성장 전략은 속도 조절이 불가피하다"며 "단기적으로는 하이브리드가 현실적인 수익 모델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브라이언 켐프(Brian P. Kemp) 조지아 주지사가 26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엘라벨에 위치한 ‘현대자동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yundai Motor Group Metaplant America, HMGMA)’ 준공식에 참석해 생산된 아이오닉 5 차량에 서명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차그룹 제공, 판매 및 DB 금지) 2025.3.27 ⓒ 뉴스1
배터리 '수요 변동성' 확대…ESS로 돌파구 모색

전기차 판매 둔화는 국내 배터리 산업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실제 지난해 전기차 수요 부진으로 배터리 업계 실적은 크게 악화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연간 흑자를 유지했지만 4분기 적자를 기록했고 삼성SDI와 SK온은 연간 영업적자를 피하지 못했다. 여기에 전기차 판매 둔화는 업계에 악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다만, 배터리 업계가 최근 전기차 배터리 판매 부진 극복을 위해 에너지저장장치(ESS) 생산시설 확대 등 사업을 재편하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지점으로 꼽힌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규제 완화는 전기차보다 내연기관 차량 수요에 유리한 환경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배터리 업계에는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면서도 "AI와 데이터센터 확대로 전력 수요는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발전 전력을 저장하는 에너지저장장치(ESS) 시장은 구조적으로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조선업계는 이번 조치가 산업 판도를 크게 바꾸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발주 비중이 높은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 업계 관계자는 "이번 정책이 글로벌 조선 수요 구조를 바꾸는 요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환경 정책 불확실성 확대…'이중 규제' 부담 현실화

이번 정책 변화는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 산업계 전반의 불확실성을 확대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미국 환경보호청(EPA)의 규제 권한이 약화하는 반면, 캘리포니아 등 일부 주는 강력한 배출 기준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기업들은 연방과 주별 규제를 동시에 충족해야 하는 '다층 규제 구조'에 직면할 수 있다.

산업계는 이번 결정이 우리 기업들의 미국 투자세액 공제에 미칠 영향에도 촉각을 세우고 있다. 당장 이를 무효화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업계는 이번 결정이 우리 기업들의 미국 투자세액 공제 정책에도 영향을 줄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투자세액 공제는 법률에 근거해 당장 폐지되지는 않지만, "온실가스가 유해하지 않다"는 정책 논리가 확산할 경우 향후 집행 과정에서 지원 요건이 강화되거나 심사 기준이 까다로워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 환경단체와 일부 주 정부가 법적 대응을 예고하고 있어 정책 방향이 다시 변경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더 큰 변수는 글로벌 규제 격차다. 유럽연합(EU)은 탄소 규제를 유지하고 있어 완성차 기업들은 미국과 유럽 시장에 맞춘 별도 설계와 공급망 전략을 구축해야 할 가능성이 커졌다. 업계에서는 이를 "글로벌 생산 효율성이 감소하는 구조적 부담 요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pkb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