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戰後 배고픔 달래주던 '라면', 지금은 '국민 야식'
- 장도민 기자

(서울=뉴스1) 장도민 기자 = "집에 쌀이 없어서 라면만 먹고 죽기살기로 뛰었어요."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을 차지했던 임춘애 선수가 밝힌 소감이었다. 당시 임춘애 선수는 이 소감으로 인해 '라면소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처럼 라면은 한국 국민들에게 밥 대신 주식으로, 또는 간식으로, 늦은 겨울밤 허기를 달래주는 야식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식품이다.
50년 넘게 허기진 전 국민의 배를 채워준 라면은 한국인의 식생활 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간단히 한 끼 식사를 해결할 때, 해외여행에 나설 때, 야외로 놀러갈 때 등 다양한 상황 속에서 접하고 있는 대중 식품이다. 최근들어서는 짜장라면, 카레라면, 우동라면, 깨라면, 비빔라면 등 개인의 입맛과 취향에 따른 선택의 폭도 넓어졌다.
세계라면협회(WINA)의 발표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세계의 라면 판매량은 1055억 9000만 개다. 이 중 국내에서 소비된 라면은 36억3000만개다. 한국인 1명 당 라면 소비량은 72개로, 2위인 일본(43개)이나 3위 중국(33개)보다 월등히 많다. 우리나라 국민이 라면을 얼마나 즐기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수치다.
전세계 각국의 식문화가 급격히 유입되면서 국내 식품업체들이 생산하는 제품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라면은 여전히 전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잇단 '웰빙' 열풍과 나트륨 줄이기 등 라면시장을 견제하는 요소가 산재한 상황이지만 해당 시장은 꾸준한 커지고 있다. 국내 라면 시장은 2011년 1조9600억원, 2012년 1조9800억원, 2013년 2조100억원 규모로 다소 더디지만 분명히 성장하는 중이다.
◇라면의 탄생
대다수의 소비자들은 '신라면'을 국내 대표 제품으로 꼽는다. 가장 보편화됐고 실제 시장 점유율도 가장 높다. 당연히 신라면의 제조사인 농심이 라면을 시장에 들여온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실제와 다르다.
하지만 국내에 라면제품을 최초로 내놓은 것은 '삼양'이다. 농심은 2년 후에 라면을 선보였으며 당시 사명은 '롯데공업주식회사'였다.
지난 1963년 9월 15일 삼양라면은 중량 100g에 10원이라는 가격으로 라면을 출시했는데 지난해 7월 별세한 고(故)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의 사연 있는 작품이었다.
당시 전 회장이 남대문 시장을 지나던 중 5원짜리 '꿀꿀이죽(콩나물국에 남은 음식을 넣은 죽 형태의 음식)'을 먹기 위해 많은 이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고 떠올린 아이디어였다.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도심 속에서 먹을 게 없던 탓이었다.
그는 전국민적인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의 명성식품에서 라면 기계 2대를 인수했고 생산에 착수했다. 기술력은 묘조식품으로부터 전수받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국내보다 빠른 산업화·도시화의 영향으로 라면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상황이었고 에스코크식품, 묘조식품 등 다수의 기업이 라면을 생산하고 있었다. 이것이 국내 라면의 첫 시작이었다.
◇경쟁체제 구축, 라면시장 성장 '촉매'
삼양식품이 라면을 내놓은지 2년 뒤 롯데공업주식회사(현 농심)도 라면을 출시하면서 시장은 본격적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1965년 9월 롯데공업은 '롯데라면'을 출시했다. 당시 유행하던 닭고기 육수를 사용해 국민적인 관심을 얻었고 때 마침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 도움까지 받았다.
이 영향으로 다양한 업체의 색다른 라면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풍년라면(풍년식품)', '닭표라면(신한제분)', '해표라면(동방유량)', '아리랑라면(풍국제면)', '해피라면', '스타라면' 등 8개 제품이 롯데라면 직후에 출시된 것들이다.
보다 본격적인 부흥기는 70년대 들어서 전쟁의 아픔이 치유되기 시작하면서 시작됐다.
1970년 농심은 국내 최초로 짜장면을 인스턴트화해서 제품을 출시했다. '짜파게티'로 널리 알려진 현재 제품의 초기모델이었다.
또 다수의 라면업체들이 TV광고와 신문 광고를 통해 제품을 알리기 시작했다. 40대 이상의 성인들 대부분이 기억하고 있는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카피도 당시에 나온 것이다.
◇"지금 당신이 떠올린 라면은 모두 80년대 제품"
식품업계 영업사원들 사이에서는 "당신이 라면을 10가지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중 9개는 80년대에 만들어진 제품일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현재 우리가 쉽게 접하고 있는 대다수의 시장 점유율 상위 제품들은 1980년대에 생산됐다.
당시 한국은 고도 성장기를 맞는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눈부신 한국 경제의 성장 현황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국민들의 주머니가 채워지면서 라면도 '황금기'를 맞게된다.
농심은 '너구리(1982)', '육개장사발면(1982)', '안성탕면(1983)', '짜파게티(1984)'를 선보였고 팔도(당시 한국야쿠르트)는 '팔도비빔면(1984년)'과 '도시락(1986년)'을, 오뚜기는 '진라면(1988년)' 등을 출시하며 현재의 라면시장 구도를 구축하게 됐다.
또한 지금은 생산하지 않지만 청보와 빙그레도 경쟁력 있는 라면 제조사였다.
◇아픔 딛고 해외로 뻗는 韓라면…키워드가 된 '다양성'
1990년대 이후 국산 라면제품들은 해외시장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90년대 진입을 1년 앞둔 1989년 우지파동이 일어나면서 라면업계가 큰 타격을 입게 됐다.
수 많은 제조사와 하청업체들이 도산하고 넘어지는 가슴아픈 시기였지만 현격히 품질을 끌어올린 시기기도 하다.
상대적으로 건강에 좋은 것으로 알려진 '팜유'가 도입됐고 위생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됐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해외 전문가들과 공업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국내 라면시장을 주목하는 외국기업들이 늘어났다.
이 때 또 한번의 '아픔'이 찾아 온다. 1997년 IMF 사태가 터지면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이 늘어났고 이는 자연스레 값싸고 간편한 라면 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자본력을 갖춘 라면업체들은 '세계화'의 흐름에 맞춰 각 국으로 라면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1996년 농심이 처음으로 중국 상하이 지역에 생산공장을 준공한 뒤 영역이 확대됐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고급화, 건강 지향, 한류 등의 요소까지 더해져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춰나가고 있다.
지난해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 열풍에서 시작된 모디슈머 트렌드는 수출량 증대의 '키워드'가 되기도 했다. 제품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해 시장을 선도해나가는 시기가 온 것이다.
지난 50년 간 라면시장이 성장해온 중요한 사건들을 되짚어보면 '근대사'와 맥이 같다. 라면이 왜 '역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 이시간에도 많은 소비자들이 역사를 맛보고 있을지 모른다. 컵라면을 들고 모니터 앞에 앉아서 당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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