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 칼럼] '달리는 태극기' 현대자동차
김화진 현대모비스 선임사외이사
지난 4월 현대차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하에서 무관세였던 자동차 수출에 갑자기 25%의 관세를 맞았다. 그 결과로 영업이익에서 수조원대 타격을 입었다. 회사와 정부가 원팀으로 애쓴 결과 15% 관세로 정리됐고 향후 그 베이스에서 글로벌 경쟁에 나서게 된다. 현대차는 지난 몇 달의 혼란 속에서도 미국 시장에서 차량 가격을 인상하지 않고 관세를 고스란히 떠안으면서 고객가치경영을 실천했는데, 향후의 어려운 시기에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현대차는 그 연원이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이 1940년부터 운영했던 자동차 정비공장 아도서비스(Art Service)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독립회사 현대자동차주식회사가 탄생한 것은 1967년 12월 29일이다. 그해 포드가 한국 진출을 결정하고 현대 측과 제휴를 확정했다.
그 후 공장 부지 매입, 박정희 정부의 자동차산업 정책 혼선, 울산 지역 대홍수로 인한 공장 침수, 포드의 현대차 접수 책략과 합작 결렬 등 천신만고를 겪었고 회사 출범 후 거의 10년 만인 1976년 1월에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가 탄생했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최초의 금메달을 땄던 해이고, 미국에서는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설립됐던 해다.
영화 '택시운전사'(2017)에서는 황 기사를 포함한 광주 택시기사들이 현대 포니를 몬다. 포니는 아마도 쏘나타 다음으로 한국 자동차산업 역사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갖는 모델일 것이다. 포니는 대성공이었고, 한국을 세계에서 16번째로 고유 모델을 보유한 나라로 격상시켰다. 포니는 2023년에 복원되기도 했다.
포니 제작에 필요한 기술은 미쓰비시의 힘을 빌렸었는데 문자 그대로 '빌린' 것이었다. 기술 유출을 염려한 미쓰비시는 보상받는 만큼만 알려주고 그 이상은 엄중한 감독과 견제를 했다. 차체 디자인은 이탈리아 업체들에 사람을 파견해 진행했다. 팩스도 없고 국제전화는 걸기가 겁나던 시절, 통하지도 않는 말로 어렵게 얻어낸 정보를 한국으로 보내느라 무진 고생들 했다.
울산공장에서는 다국적 팀이 작업을 진행했다. 포드로부터 조립기술을 배워온 기술자들이 영국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았고 디자인 설계는 이탈리아, 프레스는 프랑스, 부품 제조 기술과 생산설비는 미쓰비시, 이런 식이었다. 첫차가 출시되기까지 부품은 부품대로 조립은 조립대로 애를 먹였다. 도장 작업의 문제와 원인을 알 수 없는 잡소리까지 온갖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성공했다. 그리고 포니는 현대차의 정체성이 됐다.
1985년에는 최초의 전륜구동 엑셀이 출현했다. 마이카 붐이 시작되던 때여서 큰 성공을 거둔다. 엑셀은 처음으로 자동차 '신의 영역'인 미국 시장에 진출했던 모델인데, 성공작이었다. 1986년에 그랜저, 1988년에 거의 국민차인 쏘나타가 탄생했다. 1991년에 이미 전기차를 개발했고, 현대차는 1994년에 연 생산 100만대를 돌파한다.
1996년 정몽구 명예회장이 현대차를 맡는다. IMF 사태로 잠시 적자경영이었던 현대차는 바로 흑자를 냈고 2000년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되면서 혼란했던 때에도 6700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2001년 매출 20조 원을 달성하고 순익 1조 원 시대를 열었다. 정몽구 회장 체제가 시작된 지 10년 만인 2006년에 현대자동차그룹은 글로벌 6위에 진입했다. 2008년에 제네시스가 태어났고, 2018년에는 세계 최초로 차세대 수소전기차를 공개했다.
흔히 정몽구 리더십의 요체를 '뚝심'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반만 맞고 반은 틀린다. 자동차는 매우 섬세한 물건이고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다. 2만 개가 넘는 부품이 한 치 오차 없이 함께 작동해야 하고 사소한 잡소리에도 소비자는 발길을 돌린다. 정 명예회장은 청년 시절부터 현대자동차써비스 공장에서 잔뼈가 굵어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가장 잘 알았다. 오너가 기술에 약하면 리더십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주는데 정 회장은 헨리 포드, 포르쉐, 그리고 폭스바겐의 피에히 회장에 필적하는 최고의 엔지니어다.
1977년은 할리우드에서 조지 루커스의 스타워즈 1편(에피소드 4)이 개봉했던 해다. 한국에서는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가 달성됐던 해이기도 하다. 그해 6월 25일에 현대모비스의 모태 고려정공이 탄생했다. 현대차써비스의 휠, 범퍼 생산 시설과 컨테이너 제작라인을 인수해서 출발했다. 현대정공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현대모비스는 동력계통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고부가가치 모듈 생산업체로 성장했다. 아산은 회고록에서 "자동차 부품 공업은 세계의 황금 시장이다. 나는 자동차 부품 공업으로도 세계 시장 경쟁을 꿈꾸고 있다"고 했다. 또 "자동차의 전자화는 장차 자동차 사업의 성패를 가늠할 궁극적 핵심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도 했다. 아산의 회고록은 약 30년 전인 1998년에 나온 것이다. 애플의 아이폰이 2007년에 나왔고 지금은 전 세계적인 디지털화 시대다. 미래를 예측한 것까지는 아닐 수 있어도 아산의 안목과 결과적인 혜안이 놀랍다.
이렇게 역사를 들춰보는 이유는 바이런이 했고 처칠도 했고 정의선 회장도 즐겨 쓰는 말인 "미래가 보고 싶으면 역사를 돌아보라"라는 말 때문이다. 현대차의 역사를 돌아보면 과연 가능했을까 하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결단력과 리더십, 경영능력과 실행능력, 우수한 노동력을 합친 진취적 추진력이 동력이었다. 오늘의 현대차도 고스란히 갖고 있는 덕목들이다.
현대차는 한국 경제의 기존 구조를 규정짓는 기업이기도 하다. 포스텍의 송호근 교수는 현대차의 성장 과정이 한국 제조업의 역사이며, 현대라는 재벌의 강점과 허점이 그대로 한국경제의 내부구조로 이전됐다고 본다. 현대차의 열정과 도전은 한국 산업화의 심정적 자산과 같았고 오너, 경영자, 중간관리자, 노동자를 하나로 연결해 주는 단결과 연결의 고리, 일종의 긍정적 담합으로 1987년까지 이어졌던, 이른바 '합심의 시대'를 이끈 정신적 유전자였다.
신지정학 시대의 기업과 제품은 글로벌 시장에서 이제 뚜렷한 국적을 갖게 됐다. 아산은 자동차를 '달리는 국기'라고 불렀다.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지구촌에서 현대차는 지금보다 더 한국을 대표하게 된다. 제2의 합심의 시대에 현대차에는 국가적, 국민적 성원이 따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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