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금융기본권이 필요한 이유

김은미 서민금융진흥원 과장.
김은미 서민금융진흥원 과장.

김은미 서민금융진흥원 과장 = "살면서 힘든 순간에 필요한 최소한의 금융 접근은 일부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누구나 제도권 안에서 다시 설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할 '금융기본권'입니다."

가장 절실할 때 멀어지는 금융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서민에게 필요한 자금은 늘어나지만 금융회사의 대출 문턱은 오히려 높아진다. 실직이나 소득 감소로 생활비·주거비·의료비가 부족할 때 대출이 절실하지만, 금융회사는 연체 가능성을 우려해 심사를 강화하고 저소득·저신용자에 대한 신용공급을 줄인다. 돈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돈을 빌리기 어려워지는 금융의 역설이다.

이를 금융회사만의 문제로 볼 수는 없다. 금융회사는 예금자의 자금을 책임 있게 운용해야 하고, 경기침체와 금리 상승으로 신용위험이 커지면 대출을 보수적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러한 위험관리가 저소득·저신용자에게 집중될 때다. 모든 금융회사가 동시에 취약차주에 대한 대출을 줄이면 금융의 공백이 발생하고, 최소한의 생계자금마저 구하지 못한 사람은 고금리 대출이나 불법사금융으로 밀려날 수 있다. 민간 금융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의 일부를 공공이 나누어 부담해야 하는 이유다.

데이터가 보여준 정책서민금융의 역할

필자는 서민금융진흥원의 보증부·직접대출과 은행권 새희망홀씨를 포함한 정책서민금융 신규 대출액을 민간 금융회사의 저신용자·저소득자 대상 개인신용대출 신규 대출액과 비교해 체감경기와 금융여건 변화에 따른 반응을 분석했다.

분석 결과 소비자심리지수가 100 이하이면서 3개월 연속 하락하는 심각한 소비심리 위축 국면을 겪은 약 두 달 후 정책서민금융 신규 대출액은 6.1~6.8% 증가했다. 반면 저신용자 대상 민간 개인신용대출 신규 대출액은 한 달 후 5.4~8.8% 감소했고, 저소득자 대상 신규 대출액도 5.0~5.9% 감소했다. 가계 불안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민간의 신용공급은 먼저 위축된 반면 정책서민금융은 시차를 두고 확대된 것이다.

금융시장의 위험이 커질 때 이러한 차이는 더욱 뚜렷했다. 신용위험을 나타내는 신용스프레드가 0.1%포인트 확대되면 정책서민금융 신규 대출액은 당월 또는 1~2개월 뒤 4.0~4.7% 증가했다. 반면 저신용자 대상 민간 개인신용대출 신규 대출액은 당월 3.0~4.1% 감소했다.

은행 일반신용대출 금리가 0.1%포인트(p) 상승한 경우에도 정책서민금융 신규 대출액은 약 두 달 후 2.0~2.1% 증가했다. 반대로 같은 금리 상승기에 민간 금융회사의 신규 대출액은 저신용자의 경우 당월 1.4~1.9%, 저소득자는 1.1~1.7% 감소했다. 금리 상승이 취약계층의 상환 부담을 높일 뿐 아니라 금융접근성까지 악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결과가 의미하는 바는 정책서민금융을 경기가 나빠질 때마다 자동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민간 금융의 위험 회피가 강화돼 취약계층의 금융접근성이 약해지는 국면에서 정책서민금융이 보완적 금융안전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민간 금융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금융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으로 발생한 공백을 메워 금융시스템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막는 역할이다.

대출을 넘어 예방과 회복의 플랫폼으로

오늘날 금융은 경제생활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 인프라다. 금융에서 배제되면 취업 준비와 직업훈련, 주거 유지, 의료비 지출, 영세 자영업의 운영까지 어려워질 수 있다. 일시적인 소득 충격이 장기 연체와 신용 하락, 고금리 차입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위기 상황에서도 제도권 안에 최소한의 통로를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금융기본권은 일회성 시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회복력을 높이는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서민금융진흥원과 신용회복위원회는 거시지표에만 의존하기보다 현장의 어려움을 조기에 포착하고, 위기가 깊어진 뒤가 아니라 위험의 징후가 나타나는 순간 작동하는 금융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사후적인 자금 지원과 채무조정에 그치지 않고, 국민이 경제적 충격을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예방과 회복을 아우르는 체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기초·채무상담을 통해 소득·부채·자산 상태를 종합적으로 진단하고, 질병·사고 등 예기치 못한 충격을 완충하는 기초보험, 경제적 재기의 마중물이 되는 기초대출, 안정적인 자산 형성을 돕는 기초저축을 개인의 상황과 회복 단계에 맞춰 유기적으로 연결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금융교육과 고용·복지서비스까지 연계해 금융에서 밀려난 국민이 다시 제도권 안으로 돌아와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예방과 회복의 플랫폼’으로 발전해야 한다.

금융기본권의 궁극적인 의미는 누구에게나 조건없이 대출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실직과 질병, 소득 감소라는 충격 속에서 소득이 적거나 신용점수가 낮다는 이유만으로 제도권 금융의 기본 통로에서 완전히 배제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금융 접근 기회와 실질적인 선택지를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금융정책을 넘어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