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부장의 페르소나 벗기 [욜로은퇴 시즌2]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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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드라마는 김낙수 부장이 5억 원 퇴직금 받은 것에 5억 5000만 원을 빌려 상가를 사서 월 1000만 원 월세를 꿈꾸다 분양 사기에 걸려 버린 사건이 화제다. 10억 5000만 원 상가에 월 1000만 원을 받으려면 11%의 수익률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여러 기사에서 상가가 아닌 커버드콜 ETF를 샀으면 안전하게 월 1000만 원을 벌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한다. 커버드콜 ETF는 금융사기를 당할 위험은 없지만 그렇게 만만하게 볼 일도 아니다. 세상에 안전하게 월 1%를 얻을 자산은 찾기 어렵다.

사실 김 부장 이야기의 주제는 다른 데 있다. 상가 사기보다 더 보편적이고 중요한 문제다. 바로 '페르소나(persona) 벗기'다. 페르소나는 '탈'을 뜻한다. 고대에는 연극을 할 때 슬픈 연기에는 슬픈 표정의 탈을, 화난 얼굴의 연기에서는 화난 탈을 썼다고 한다. 이 의미가 발전해서 페르소나는 이제 '사회적 가면'을 뜻하게 됐다. 판사, 의사, 정치인, 기업인 등 모두 자신의 역할에 따른 가면을 쓰고 있다.

아마 직장인이 가장 오래 쓰고 있는 페르소나는 그 직장맨으로서의 가면일 것이다. 요즘은 덜하지만 이전에는 '삼성맨', '현대맨' 등으로 부를 정도였다. 김 부장도 25년 동안 통신회사 ACT의 페르소나를 쓰고 있었다. 가족보다 더 친밀하게 지냈다. 지금의 상무와는 사원, 대리 관계에서부터 동고동락했다. 회사 일이 바빠 자기 아들의 졸업식은 한 번도 못 갔지만 상사 자녀의 졸업식은 모두 챙긴 김 부장이었다. 'ACT 다니는 김 부장'이 자신의 정체성이었다. 심지어 형도 다른 사람들에게 동생을 소개할 때 ACT에 부장으로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기업 김 부장이라는 페르소나는 회사 나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사표를 호기롭게 냈지만 재취업을 하려니 월급이 200만 원 남짓이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다는 호가호위(狐假虎威)란 말이 있다. 여우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자신의 위대함을 보여줄 테니 따라와 보라고 한다. 호랑이가 여우 뒤를 따라가니 다른 동물들이 모두 놀라서 도망을 간다. 김 부장 뒤에는 ACT가 있었고 ACT 후광이 사라지자 그냥 중년의 아저씨가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김 부장은 계속 ACT의 페르소나를 쓰고 있으려 애썼다.

그러다 분양 사기를 당하게 된다. 상대방이 '역시 대기업 부장님은 보는 눈이 다르고 일 처리 하는 게 다르다'고 치켜세우자 덜컥 계약을 해버린 것이다. 대기업 부장으로서의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 결정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스틸컷

사실 김 부장은 ACT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기 위해 무진 애를 많이 쓴다. 상무가 자신을 한 번만 도와주면 중소기업 임원 자리에 꽂아주겠다고 하지만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세차장을 선택한다. 대기업 부장의 페르소나를 던져 버린 것이다. 쉽지 않다. 심지어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임원 차 세차하는 입찰에 응모해서 합격한다. 이 정도 노력은 보통 사람이 못 따라 한다. 백전노장의 영업맨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김 부장은 계속 마음이 편치 않다. 공황 장애도 지속된다. 결국 술을 마시고 돈이 없어 집까지 걸어가다가 탈진한 상태에서 자신의 진짜 자아와 대화를 한다. 자신이 왜 이렇게 회사의 타이틀에 목을 매고 상무라는 직함에 올인을 했는지 반추한다. 그리고 ACT 부장이나 상무라는 페르소나가 집요하게 얼굴에 붙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필자는 요양원에 어머니를 찾아뵈러 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휠체어를 밀고 오는 남성을 만났다. 생면부지의 사람인데 인사를 해서 물어보니 유튜브에서 필자를 봤다고 한다. 자신은 현대차에서 30년 영업을 하다 보니 한번 본 얼굴은 기억한다고 했다. 퇴직 후 지금은 물리치료 일을 하고 있었다. 표정도 좋고 무엇보다 생기 있게 보였다. 이 남성이 페르소나를 바꾸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는 현대차의 페르소나에서 요양원 물리치료사로서의 페르소나로 잘 바꿔 쓰고 삶도 행복해진 것 같다.

페르소나를 벗기는 쉽지 않다. 특히 직장의 페르소나는 그 가면을 너무 오래 써서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 페르소나를 자신의 원래 얼굴이라 착각한다. 페르소나를 벗었다 하더라도 자기 민낯에 당황하게 된다. '부장님, 부장님' 소리를 듣다가 그냥 아저씨 소리를 듣는다. 조직의 보호막이 사라지면서 넓은 벌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개인을 발견하게 된다.

김낙수 부장은 세차장을 계속하고 있지만, 처음 세차장을 시작할 때와 극의 마지막에서 세차장을 할 때의 행복도가 다르다. 처음에는 억지로 자신을 낮추려 하면서 마음의 괴로움은 커져갔지만 지금은 그런 저항감이 없어졌다. 김 부장은 본래의 자신을 용기 있게 마주하면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기업 김 부장이라는 페르소나를 벗어 버린 후의 민낯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도 이제 연말이면 27년 가까이 다닌 미래에셋의 페르소나를 벗어야 한다. 27년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미래에셋 김경록입니다'를 말해 왔는데 이제는 이렇게 말하지 못한다. 변해야 한다. 하나의 희망이라면 사람들은 의외로 변화에 적응을 잘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명성에 집착하고 미래의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는데, 필자 주변의 친구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그러니 과거의 명성에 과도한 비중을 두지 말고 미래 적응에 너무 근심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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