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LNG·이란'까지 꺼낸 美…한·미 대미투자 협상 '복합딜'로

美, 반도체 투자 요구 확인한 청와대 "논의 대상 된 것은 현실"
트럼프, 다시 꺼낸 알래스카 LNG…"갈등 관리하며 실익 확보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여행업계 경영진과 만나고 있다. 2026.9.2 ⓒ 로이터=뉴스1

(세종=뉴스1) 이정현 기자 = 9월 중 대미투자 프로젝트 선정을 앞두고 한미 간 막판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동안 추측으로만 제기됐던 미국의 '반도체 투자' 요구가 사실로 확인됐다. 청와대가 미국 측의 반도체 관련 투자 요구가 한미 협상의 공식 논의 대상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다.

특히 정부가 여당에 대미투자 협상 관련 내용을 비공개로 보고하기로 하면서 협상이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반도체 투자 방식과 규모, 기존 2000억 달러 대미투자와의 관계 등 핵심 쟁점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이다.

미국이 삼성전자(005930)와 SK하이닉스(000660)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의 현지 생산시설 확대를 요구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는 가운데, 양국의 협상 쟁점은 단순히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를 넘어 '누가 어떤 조건으로 사업을 가져갈 것인가'로 확대하는 양상이다.

더욱이 협상 막판 미국의 압박 수위는 경제·통상을 넘어 외교·안보 영역으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의 대(對)이란 지원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불만을 표출하는 한편, 반도체에 대한 표적관세 가능성도 언급했다.

여기에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에 한국의 참여를 재차 거론하면서 대미투자를 둘러싼 한·미 협상이 지난해 관세협상보다 훨씬 복잡한 '패키지 딜'로 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청와대가 확인한 '반도체 투자'…삼전닉스 현지 생산시설 요구 가능성

7일 정부와 통상당국 등에 따르면 대미투자와 관련한 미국의 반도체 투자 요구는 사실로 확인된다. 지난 4일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미국 측의 제기가 있어 논의 대상이 된 것은 현실"이라고 밝혔다. 다만 "어떻게 어떤 방식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며 “미측이 제기를 했기 때문에 논의 대상이 된 정도"라고 설명했다.

반도체 투자가 한미 간 합의된 2000억 달러 규모 대미투자와 별개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잘 논의해서 저해 요인이나 장애요인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구체적인 요구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시장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의 미국 내 제조시설 투자 확대가 핵심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미국이 관세를 무기로 자국 내 생산 확대를 압박하고 있는 데다, 트럼프 행정부가 반도체를 미국의 제조업·공급망 재편 전략의 핵심 산업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반도체에 대해 미국 내 제조시설을 지으면 관세 감면 혜택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미국 시장 진입을 위해 관세를 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기도 했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역시 반도체에 대한 '표적화되고 신중한 관세 정책'을 예고했다.

결국 양측의 간극은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보다 '어떤 조건으로 투자할 것인가'에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대규모 자금이 자국 내 생산과 고용, 공급망 확대로 이어지기를 원하지만 한국으로서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만큼 투자 수익성과 사업의 상업적 타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특히 2000억 달러 대미투자를 둘러싼 양국의 양해각서에는 전략투자를 관리하는 우산형 투자 특수목적회사(SPV)를 두고 미국 또는 미국이 지정한 주체가 이를 관리·지배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개별 프로젝트에서도 미국이 전적으로 소유하는 별도 SPV가 언급된 만큼, 실제 사업 추진 과정에서 한국 기업의 지분과 의결권, 수익 배분 및 경영권을 어느 수준까지 인정할지가 쟁점이 될 수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의 자금으로 미국 내 생산 기반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한국 기업 입장에서는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사업의 소유권과 수익성을 확보해야 한다. 결국 반도체라는 사업 자체보다 투자 구조와 조건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협상 속도를 늦추는 요인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한편 정부가 여당에 대미투자 협상 관련 내용을 직접 보고하기로 하면서 협상이 최종 조율 단계에 들어선 것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된다.

복수의 더불어민주당 관계자에 따르면 민주당 재정경제기획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7일 오전 국회에서 비공개 당정협의회를 열고 산업통상부로부터 대미투자 협상 관련 내용을 보고받을 예정이다.

이번 당정협의회에는 박정성 산업부 통상교섭본부장을 비롯한 협상 실무자들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23일(현지시간) 무역법 301조를 근거로 10∼12.5%의 '강제노동 관세'를 60개국에 부과했다. 한국은 강제 노동 수입 금지 조치 미시행 국가군(46개국)에 포함돼 사실상 최고 세율인 12.5% 관세를 적용받을 전망이다. 다만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이미 품목관세가 부과 중인 자동차 및 부품, 철강·알루미늄·구리 등은 이번 관세가 적용되지 않는다. 사진은 24일 경기 평택항에 수출용 컨테이너가 세워져 있는 모습. 2026.7.24 ⓒ 뉴스1 김성진 기자
반도체에 안보·LNG까지…경제·외교·안보 묶인 '고차방정식'

문제는 대미투자 협상이 이제 경제·통상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한국을 겨냥한 공개 발언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협상 테이블에 외교·안보 변수까지 올라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이란과의 전쟁과 관련해 한국 등 동맹국들이 미국을 돕지 않았다는 취지의 불만을 다시 드러냈다. 한국에 주둔 중인 잘못된 미군 규모를 재차 언급하면서 이란과 관련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한국이 거절했다는 주장을 내놓은 뒤 "기억해 두라"고 엄포를 놨다. 앞서 지난달 19일에도 한국의 호르무즈 해협 관련 대응을 거론하며 불쾌감을 표시한 바 있다.

표면적으로는 이란전과 동맹국의 역할에 대한 불만이지만, 대미투자 협상이 진행 중인 시점이라는 점에서 경제 현안에 대한 우회적 압박 카드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특히 한국 정부가 호르무즈 해협 통항을 위한 기여 방안을 검토하는 상황까지 맞물리면서 투자와 안보 현안의 연계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까지 다시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한국과 일본을 직접 거론하며 양국이 알래스카로 가서 연료·석유 운송과 파이프라인 건설 등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는 트럼프 행정부가 한·일 대미투자와 연계해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사업이다.

결국 현재 한·미 협상은 반도체와 에너지, 투자구조라는 경제 현안에 더해 관세와 외교·안보까지 한꺼번에 얽힌 형태가 됐다. 지난해 관세협상 당시에도 한국은 관세율과 대미투자를 맞바꾸는 고난도 협상을 벌였지만, 이번에는 투자 프로젝트의 선정과 조건뿐 아니라 반도체 생산시설, LNG, 안보 기여까지 협상 변수로 떠오른 셈이다.

트럼프식 협상에서 다양한 현안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상대방의 양보를 끌어내는 방식은 새롭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국이 이미 대규모 대미투자를 약속한 상황에서 추가적인 사업 참여와 투자 조건까지 요구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부담이 더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9월 중 대미투자 프로젝트 선정·발표를 앞두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관건은 미국이 요구하는 사업과 한국이 수용할 수 있는 투자 조건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수 있느냐가 될 전망이다. 반도체·LNG 등 미국이 원하는 사업을 얼마나 담을지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한국 기업의 수익성과 경영권 등 상업적 이해를 어떻게 보장할지가 막판 협상의 핵심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 뉴스1 방은영 디자이너
"美, 中 견제로 韓 공급망 수혜 인식…갈등은 관리하며 실익 확보 전략 필요"

허윤 서강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한미 간 대미투자 협상이 반도체를 비롯한 산업·통상 현안뿐 아니라 외교·안보 이슈까지 묶인 형태로 진행되는 데 대해 미국의 압박에는 중국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누려온 공급망상의 수혜에 대한 인식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허 교수는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을 서방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이 상당한 수혜를 입었고,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에 상당한 혜택을 주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며 "이 때문에 메모리 반도체 공장 건설이나 조선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에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미국의 무역적자 확대와 공급망·방위산업의 중국 의존도 축소가 맞물리면서 한국·대만·일본 등 동맹국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것이 미국의 큰 그림이라는 게 허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미국은 자국 공급망을 안정화하고 방위산업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동맹국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한국과 대만, 일본에 대한 수요를 키우는 동시에 미국이 가진 레버리지를 활용해 압박을 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요구를 무조건 거부하기보다는 미국 공급망 및 혁신 생태계에 편입하면서 실익을 확보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허 교수는 "미국과 전적으로 등을 돌릴 경우 예상되는 후폭풍을 고려해 갈등 요인은 최대한 관리해야 한다"며 "미국의 혁신 생태계에 편입하고 미국과 공급망 연계를 맺는 기업들을 중심으로 서방 제조업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가장 실익 있는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의 요구가 부담스럽다고 해서 갈등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미국이 한국에 줄 수 있는 불이익은 상당히 많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반도체 투자 요구'가 기존 2000억 달러 대미투자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별도 투자일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허 교수는 "반도체는 공장 하나를 짓는 데 들어가는 비용 자체가 워낙 크기 때문에 2000억 달러 안에서 별도의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반도체 투자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요구하기 때문에 2000억 달러와 별도로 요구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일부를 활용하는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미 정부가 국내에서 대규모 반도체 메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 또 다른 대규모 투자를 중복해서 진행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미국이 한국의 대미 반도체 무역적자를 고려해 현지 생산 확대를 고민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euni1219@news1.kr